FASHION

2025년 가을, 새로운 우아함의 시대로 접어들다

가장 동시대적인 여성성에 대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현답.

프로필 by 이진선 2025.09.01

21세기적 우아함에 대하여


가장 동시대적인 여성성에 대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현답. 2025년 가을, 새로운 우아함의 시대로 접어들다.


Khaite Alaïa Fendi Prada Ferragamo Chloé Acne Studios Chloé Miu Miu

1992년 <하퍼스 바자> 미국판 9월호 커버, 당대 최고의 패션 사진가 패트릭 드마셸리에가 촬영한 린다 에반젤리스타의 얼굴 옆으로 패션사에 길이 남을 문구가 적힌다. ‘Enter the Era of Elegance(우아함의 시대로 들어오라)’. 책 속에는 톱 모델 크리스티 틸링턴과 함께한 가을 키 룩 화보도 담겨 있었다. 아이작 마즈라히, 도나 카란, 칼 라거펠트의 샤넬, 오스카 드 라 렌타, 조르지오 아르마니, 랄프 로렌 등 시대를 대표했던 극도로 우아하고 정제된 룩들은 정말이지 지금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25년의 가을, 과연 우리는 어떤 우아함의 시대를 마주하게 될까? 그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고민은 역시나 가장 동시대적인 ‘여성성’에 대한 것일 터. 사실 패션계에서는 거의 매 시즌 이에 대한 논쟁의 장이 펼쳐져왔다. 확실한 건 잘록한 허리가 강조된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카디건을 걸친 채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는 트래드와이프(tradwife, 바깥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보다 가족의 욕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아내) 룩과는 거리가 있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패션 하우스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2025 F/W 시즌에 어떤 해답을 내놓았을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여성이란 무엇인가요? 여성미란 무엇인가요? 오늘날 여성성이란 무엇인가요?” 지난달 ‘2025 F/W Runway Report’ 기사에서 언급했듯 새로운 컬렉션 전체에 여성성에 대한 고찰을 녹여낸 프라다가 그 선봉에 있다.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는 10년 전 한 인터뷰를 통해 “패션계의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뻔하고 오래된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에 심취해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고, 그녀와 함께 프라다를 이끄는 라프 시몬스 역시 쇼 시작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여성스러운 아름다움, 그 원형을 생각하면 신체에 많은 제약이 뒤따르죠. 하지만 이 쇼에서는 자유로울 거예요.” 그 두 사람이 합작해 선보인 컬렉션은 ‘날것의 화려함(Raw Glamour)’이라는 키워드 아래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피스들(이토록 겸손한 LBD라니!)로 가득 채워졌다. 물론 미우미우 쇼에서도 같은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컬러풀한 니트웨어는 콘브라의 부활로 뾰족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구긴 드레스들은 어깨 끈이 흘러내려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캘빈 클라인, 케이트, 아크네 스튜디오, 맥퀸에서도 이처럼 페미닌한 피스를 거칠거나 지저분(messy)하게 재해석한 룩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변형으로 클래식한 레이디라이크 룩에 그런지한 요소를 주입한 컬렉션도 눈길을 끌었다. 키 피스는 바로 페이크 퍼 코트. 레이스가 장식된 슬립 드레스에 빈티지한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퍼 코트를 매치해 드레스다운한 페라가모와 끌로에가 대표적인 예다.


Alaïa Khaite Alaïa Bally McQueen Calvin Klein Acne Studios Prada Saint Laurent

드라마틱한 드레스나 전통적인 레이디라이크 룩을 유니크하게 재해석한 방식도 새롭게 다가온다. 실루엣을 탐구하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인 알라이아의 피터 뮬리에는 볼륨감 있는 스윙 스커트에 튜브형 후드 톱을 매치하는가 하면 조각 같은(실제 조각가 마크 맨더스 작품에서 영감을 받기도) 이브닝 드레스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여성의 곡선미에 집중했으나 전형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생 로랑의 피날레 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골반 아래에서 퍼지는 스커트의 풍성한 볼륨은 크리놀린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었으며 그 위로 무심하게 걸친 오버사이즈의 바이커 재킷은 이브닝 룩에 쿨함, 그 이상의 새로운 우아함을 부여했으니. 그 밖에도 ‘Beauty(아름다움)’를 키워드로 빅토리안 스타일에 드라마틱한 볼륨감을 더한 마크 제이콥스, 드레스 한 벌에서 일상 그리고 해방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한 시몬 벨로티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 발리가 대표적인 예다.

결국 동시대적인 여성성이란 전통적인 여성성을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저마다의 결과물은 달랐으나 생각은 같았으리라. 패션의 본질에 집중하고,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자는 것. “가식적이거나 거만하지 않고 조각적인 방식으로 옷에 접근하는 것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패션은 정말 특별하지만 필수적인 건 아니기도 하죠. 단순히 몸을 덮는 천 조각이 아닙니다.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죠.” 2025 F/W 시즌, 새 컬렉션을 선보이며 들뜬 마음으로 인터뷰를 한 마크 제이콥스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의 우아함은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1992년 <하퍼스 바자>의 커버 사진과는 결이 다르다. 조금은 거칠고, 약간은 엉뚱하며 때로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아이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2025년 가을, 우리는 새로운 우아함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Saint Laurent Marc Jacobs Prada Miu Miu Acne Studios

여성스러운 아름다움, 그 원형을 생각하면 신체에 많은 제약이 뒤따르죠. 하지만 이 쇼에서는 자유로울 거예요. - 라프 시몬스

Credit

  • 사진/ Launchmetrics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