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마랑이 사랑한 이비사
파티의 섬을 넘어 야생의 자연과 자유로운 삶이 펼쳐지는 곳. 디자이너 이자벨 마랑이 25년 넘게 이비사를 찾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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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사에서 온 편지
‘에이비사(Eivissa, 이비사의 카탈루냐어 이름)’는 이자벨 마랑이 어릴 적부터 찾던 곳이다.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비사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비사 사람들은 당신의 나이나 직업, 출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건 관계, 즉 그 순간 당신과 나누는 교감의 즐거움입니다.
하퍼스 바자 처음 이비사를 알게 된 건 언제였나요?
이자벨 마랑 다들 그렇듯 어릴 때 파티를 즐기기 위해 방문했어요. 18~20살 무렵이었죠. 처음엔 주말을 보내러 갔었는데, 당시 활주로 옆 공터에 있던 아주 작은 전설적인 클럽 ‘DC-10’에 갔어요. 비행기가 이륙할 때면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갔지만,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비행기 엔진 소리도 안 들렸죠. 초현실적이고, 굉장히 매력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해안을 통해 이비사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멋진 요트를 가지고 계셨던 덕분에 발레아레스 제도를 여러 번 돌았거든요. 그러면서 전에는 전혀 몰랐던 섬의 새로운 이면, 즉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야생적이고 경이로운 해만(海灣)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비사에는 배로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많아요.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죠. 저는 울창하게 우거지는 이곳의 자연과 아름다운 바위들, 붉은 흙을 사랑합니다.
하퍼스 바자 언제부터 더 자주 가게 되었나요?
이자벨 마랑 25년 전쯤, 한 친구가 “아는 친구에게 빌릴 만한 아주 예쁜 핀카(finca, 스페인식 농장 주택)가 있는데 관심 있어?”라고 물었어요. 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이비사에 대해 ‘테크노 음악이 쿵쾅거리는 파티의 섬’이라는, 약간 캐리커처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크게 끌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집을 보자마자 단번에 매료되었어요. 무엇보다 내륙 지역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때 저는 이비사가 좁은 지역에 밀집한 나이트클럽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무심코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핀카의 웅장한 건축물과 자연에 완전히 매료되어 몇 년 동안 그 집을 계속 빌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곳에 오면 마음이 정말 편안해지는 걸 느껴 결국 저만의 집을 사게 되었고요.
하퍼스 바자 집을 산다는 건 큰 결정인데요. 굉장히 진지해진 셈이네요!
이자벨 마랑 네, 제 집은 섬 북쪽에 있어요. 그곳에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낸답니다. 생트로페나 카프리섬처럼, 다소 과대평가된 것처럼 보이는 장소들은 다 이유가 있어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죠. 그런 곳들이 인기가 많은 건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데, 이비사의 특별함은 제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극강의 해방감’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그들은 허세나 가식 없이 다정하고 따뜻하며, 엄청나게 열린 마음을 가졌거든요. 집을 샀을 때 이웃집 이비센코(ibicenco, 이비사 원주민) 농부 부부를 초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남편은 어부였고, 아내는 태어난 농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분이었어요. 제가 “이렇게 몰려와서 당신들을 침범하는 미친 사람들 때문에 짜증 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들은 “아니요, 전혀요.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우린 아무것도 없었는데, 저 관광객들이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고 다른 세상에 눈뜨게 해주었죠”라고 대답하더군요. 관광객이 자신들을 존중하는 한, 그들도 관광객을 존중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이비사에서는 엉덩이에 깃털을 꽂고 마트에 가더라도,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인사만 잘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이 섬에 크게 매료된 이유 역시 이러한 개방적인 성향 때문이에요. 아쉽게도 요즘은 섬이 엄청난 부자들의 차지가 된 데다 조그만 집이나 렌트비조차 터무니없이 비싸지면서 그런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새벽 6시까지 파티를 하다가 그제서야 “근데, 너는 무슨 일 해?”라고 묻던 기억이 나네요. 상대방과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화도 하기 전에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묻는 미국과는 정반대죠. 이비사 사람들은 당신의 나이나 직업, 출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건 관계, 즉 그 순간 당신과 나누는 교감의 즐거움입니다.
하퍼스 바자 이곳에서의 평소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이자벨 마랑 계절마다 다릅니다. 저는 비수기 때 이비사를 발견했는데, 그때는 그저 끝없는 행복 그 자체예요.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죠. 누군가 길을 따라 꽃 장식을 해놓은 것처럼 데이지 꽃과 야생 회향들이 피어 있는데, 정말 마법 같은 초원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6월 15일만 지나면 강한 햇살에 초원이 다 타버리고 훨씬 건조해지기 때문에 여름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물론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장엄한 우산소나무들은 여전히 있지만요. 비수기에는 사람들도 훨씬 평화롭고, 덜 열광적이며 현지인들도 여유로워서 정말 환상적인 섬이 됩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뙤약볕도 없고요. 겨울에는 야생적이고 개발이 덜 된 자연 속을 많이 걷습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절벽을 따라 걷다 보면 가끔 아름다운 옛 폐허를 발견하기도 해요. 반면 여름에는 사람들이 훨씬 늦게 일어납니다. 너무 덥기 때문에 해가 지고 조금 선선해질 무렵부터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게 즐겁거든요. 그래서 오후 3시 전에는 아무도 점심을 먹지 않아요. 또 점심 식사 때 로제 와인을 한잔 마신 상태라면 낮잠은 필수죠. 보통 저는 저녁 7시 30분이나 8시쯤 바닷가로 나가서 해가 지고 모든 것이 조금 차분해지는 9시 30분까지 머뭅니다. 사실 이비사의 일정은 ‘아무런 일정이 없는 것’이고, 그게 정말 멋진 점이죠.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오늘 밤에 뭐해? 바비큐 파티에 올래?”라는 제안을 받기도 하고, 해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먹다 즉흥적인 계획에 휘말리기도 하죠. 아무튼 꽤 즉흥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그게 정말 좋아요.
하퍼스 바자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나요?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도 있을까요?
이자벨 마랑 저는 항상 집에 많은 사람을 초대합니다. 가끔은 후회할 때도 있어요. 이곳에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을 만나기가 조금 어렵거든요. 그들이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면, “좋아, 근데 우리 집에 지금 15명이나 있는데!”라고 말하곤 해요.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서 다 같이 요리해 먹어요. 여름에 제가 많이 하는 것 중 하나는 배를 빌리는 겁니다. 북적이는 곳을 피해, 8월 15일 한여름에도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해만으로 가기 위해 항상 작은 어선을 빌리죠. 이비사에서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장소는 포르멘테라(Formentera)섬이에요. 저는 항상 휴가 속의 휴가를 즐깁니다. 포르멘테라는 배로 15분 거리에 있는데, 분위기가 이비사와 달라요. 이비사가 바다에 떠 있는 바위라면, 포르멘테라는 거대한 모래 해변이 있어서 마치 세이셸(Seychelles, 동아프리카에 있는 공화국. 환상적인 해변으로 유명하다)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하루 정도 가볍게 나들이 다녀오기에 참 좋습니다.
하퍼스 바자 수영하는 것도 좋아하나요?
이자벨 마랑 수영을 정말 즐겨요. 이 해만에서 저 해만으로 헤엄쳐 건너가는 걸 좋아하죠. 가끔 한 해만에서 피크닉을 하다가 수영해서 해만을 4개 건너 가기도 해요. 그러다 우연히 다음 해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와서 한잔해”라는 말을 듣고 2시간 동안 사라져버릴 때도 있죠. 돌아오지 않는 저 때문에 남편이 깜짝깜짝 놀라곤 해요.(웃음)
하퍼스 바자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당신의 패션에 영향을 미쳤나요?
이자벨 마랑 이비사는 제 패션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제 주위에는 오랫동안 전 세계를 여행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여름엔 이비사, 겨울엔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을 여행하며 온갖 곳에서 다양한 물건을 가져오는 ‘트래블러(traveller)’ 그룹이 있어요. 그게 제가 일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제가 이비사를 그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비사는 음악의 섬이기도 한데 제 작업에서 음악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섬에는 1960년대부터 뮤지션들이 살았어요.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그리고 수년 동안 이곳에 집을 가지고 있던 니나 하겐 등이 있었죠. 니나 하겐은 분홍색, 초록색 머리에 호피 무늬 레깅스와 같은, 말도 안 되게 파격적인 룩으로 그녀의 르노 4L 자동차에서 내리곤 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비사가 특유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기저에 남아 있긴 하지만요. 음악가들의 자리가 축구선수들로 대체되고 있는데, 그건 매력이 좀 덜하죠.
하퍼스 바자 그런 변화가 이비사에 가는 것을 망설이게 할 정도인가요?
이자벨 마랑 사실 코로나 이후 부유한 사람들이 꽤 많이 정착하긴 했지만, 좋은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라서 두 부류가 잘 섞여 있습니다. 환경 문제나 인간에 대한 존중 등 이 섬을 위해 일을 하는 현지인도 많아요.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이비사의 모습이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퍼스 바자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나요?
이자벨 마랑 바람이 아니에요. 저는 이미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요! 게다가 이비사는 여전히 접근성이 좋고, 가기 복잡하지도 않아요. 적어도 그리스의 섬들보다는 훨씬 쉽죠. 제가 휴가에 초대했던 친구들 중에 아예 이비사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친구들도 많아요. 다들 10년은 젊어졌고 무척 행복해 보여서 질투가 날 정도예요. 그리고 겨울이라고 해서 죽어 있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전시회도 있고, 꽤 고급스러운 작은 레스토랑도 늘어나고 있어요. 미식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인데, 가식적이거나 허세 부리지 않아서 아주 즐겁습니다. 새로 문을 여는 장소도 많아요. 특히 스페인의 새로운 세대(여행을 많이 다니고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고 있는 섬 농부들의 자녀들)가 주도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죠. 이 새로운 세대들이 이비사의 정신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하퍼스 바자 현지 언어도 구사할 줄 아는지.
이자벨 마랑 스페인어를 아주 잘하고 이비센코어도 할 줄 압니다. 제 영국 친구들 중엔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이들이 있어요. 제가 “창피하지도 않아? 말도 안 돼!”라고 하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별로 친절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비센코어는 아주 재밌는 언어인데 카탈루냐어와 매우 비슷하죠. 스페인어보다 오히려 프랑스어와 가까운 느낌이라 이해하기 꽤 쉽습니다. 섬 주민에게 이비센코어로 단어 세 개만 말해도 바로 호감을 얻을 수 있죠. 저는 이비센코 이웃 주민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는 정원에 와서 “이 돌 좀 봐, 이 돌의 얼굴을 봐봐, 돌에 깃든 영혼을 한번 보라구”라고 말하곤 해요. 1950년대 프랑스 남부에서 느낄 수 있었던,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작가이자 영화감독)풍의 진정한 시적 감성이 깃들어 있죠.
하퍼스 바자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요?
이자벨 마랑 좋아요, 한 곳 알려드릴게요. 바로 산트 조르디(Sant Jordi) 벼룩시장입니다. 그곳에서 이비사의 모든 영광을 볼 수 있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고, 특히 파격적인 룩을 입고 아직도 그곳에 있는 늙은 ‘바바 쿨(baba cool, 히피풍의 여행자, 가장 먼저 시장에 정착한 이들)’도 있죠. 그곳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와 같아요. 정말 한번쯤 가볼 만한 곳입니다.
Credit
- 글/ Olivier Nicklaus
- 사진/ ⓒ Isabel Marant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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