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클리프 아펠의 핑크
알함브라 최초의 핑크 애나멜, 그 아름다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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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THE PINK
반클리프 아펠은 익숙한 핑크를 만드는 데 가장 오래된 방법을 택했다. 골드 루비에서 시작해 알함브라 최초의 핑크 에나멜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색이 완성되는 시간을 따라가본다.
인간이 붙잡으려 한 것 중 색만큼 빨리 달아나는 것도 없었다. 꽃은 사흘이면 시들고 노을은 15분 남짓이면 사라지고 물감은 몇십 년이면 바랜다. 아름다움을 손에 넣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라지는 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라지는 색을 사라지지 않는 것 안에 가두려 했다. 그러다 유리를 발견했다. 유리는 색을 품은 채로 굳고, 한 번 굳은 색은 바래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금속 판 위에 색을 지닌 유리 가루를 올려 불에 넣으면 가루가 녹아 금속에 밀착한다.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색 자체를 구워서 가둬버린다. 그러니 그 한번 굳혀진 색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그대로 자신을 지켜낸다. 이 방식을 서양에서는 에나멜, 우리나라에서는 칠보라고 부른다. 에나멜은 3500여 년 전 그리스 미케네 문명에서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내 전 세계 여러 문명, 특히 왕실의 장식 예술을 위한 고귀한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역시 칠보를 비녀와 떨잠, 노리개 같은 여성 장신구에 즐겨 사용했다. 신기하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렇게 색을 붙잡아두는 것에 집착한 것을 보면 어쩌면 변치 않는 색을 찾으려는 건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시대의 미학자인 테오필 고티에는 “화가여, 수채를 버려라. 너무나 연약한 그 색을 에나멜 장인의 가마에 붙들어 매어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견고한 예술만이 영원을 가진다”라는 시를 다 남겼겠는가. 견고한 색을 만드는 일은 이미 공예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없이 변하는 인간이, 변치 않은 아름다움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Born of Fire, 불에서 태어난 색
반클리프 아펠은 1906년 파리 방돔 광장 22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흥미로운 건 반클리프 아펠이 가진 가장 오래된 소장품이 주얼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1906년경 제작된 바루나 요트의 축소 모형으로, 뉴욕 사교계 인사였던 유진 히긴스가 자신의 요트를 본떠 주문한 장식품이다. 골드와 실버, 재스퍼와 나무로 만들어졌고 안에는 집사를 부르는 벨이 숨어 있다. 이 배에는 에나멜이 쓰였다. 반클리프 아펠의 출발점에 에나멜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후의 역사를 보면 필연에 가깝다. 에나멜은 1925년의 앙벨로프 베니티 케이스와 1928년의 시가렛 박스에서 아르데코의 기하학적 선과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냈고, 1950년대와 1960년대 부티크 컬렉션의 애니멀 클립 위에서는 자연의 미묘한 색을 옮겼다. 1964년의 지라프 클립, 1966년의 카필레르 클립, 1974년의 버터플라이 클립이 그 계보에 있다. 워치로 넘어온 것은 2006년이다. 반클리프 아펠의 첫 포에틱 컴플리케이션 워치인 레이디 아펠 상트네르(Lady Arpels Centenaire)를 시작으로 에나멜은 다이얼 위에 자리 잡았고, 이후 레이디 아펠 퐁 데 자모르(Lady Arpels Pont des Amoureux)를 비롯한 타임피스에서 깊이감 있는 장식을 가능하게 했다. 엑스트라오디네리 다이얼(Extraordinary Dials) 컬렉션이 그 정점에 있다. 120년 가까이 반클리프 아펠은 색을 굽는 일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 축적이 지금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반클리프 아펠의 에나멜 공방이 현재 구사하는 기법이 열다섯 가지가 넘는다. 섬세한 미니어처 페인팅, 두 가지 색조의 농담만으로 명암을 만드는 그리자유,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플리크 아 주르, 정교한 데칼 등. 여기에 3년 과정의 자체 에나멜링 학교까지 두고 있다. 그들에게 에나멜 기술은 이제 일종의 사명감이다.
행운을 상징하는 알함브라의 네잎클로버 모티프 스케치.
The Shape of Luck, 행운의 형태
1968년, 반클리프 아펠은 이후 자신의 얼굴이 될 물건을 내놓는다. 네잎클로버 형태에서 영감을 받은 첫 알함브라 롱 네크리스다. “행운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행운을 믿어야 한다.” 에스텔 아펠의 조카인 자크 아펠이 즐겨 하던 말이다. 그는 파리 근교 제르미니 레베크의 자기 집 뒷마당에서 찾은 네잎클로버를 눌러 말린 뒤 포기하지 말라는 뜻의 영시 한 편을 함께 넣어 직원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러니 그는 행운을 믿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찾아 나선 사람이기도 했다.
텍스처가 돋보이는 옐로 골드 모티프 20개를 더블 비즈 윤곽으로 감싼 알함브라 롱 네크리스는 출시와 동시에 성공을 거뒀다. 선은 단순했고 형태는 정연했지만 어느 쪽도 과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목걸이는 반클리프 아펠이 당시 전개하던 라 부티크 라인, 그러니까 하이주얼리의 무게를 덜어낸 데이 주얼리에 속해 있었다. 이후 반세기 넘게 알함브라는 반클리프 아펠의 아이콘이 되어 네잎클로버 안을 채우는 소재를 변주하며 매번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오닉스와 카닐리언, 말라카이트와 튀르쿠아즈, 머더오브펄, 기요셰 골드, 세브르 포슬린까지. 다만 그 목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자연이 만들어둔 색을 캐내어 다듬은 것이었다는 점이다.
The First Pink, 알함브라의 첫 핑크
이번에 메종이 내놓은 답은 조금 다르다. 에나멜은 자연이 온전히 만든 색이 아니라 인간의 조율로 얻어낸 색이다. 말 그대로 자연과 인간의 협업이다. 1968년 이래 알함브라에 에나멜이 쓰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새로운 주얼리 세트는 다섯 점으로 구성된다. 모티프 20개의 롱 네크리스, 모티프 10개의 네크리스, 모티프 5개의 브레이슬릿, 펜던트, 그리고 이어링. 모두 옐로 골드이며 알함브라의 대표적인 형태가 고루 포함됐다. 색은 핑크다. 다만 흔히 떠올리는 핑크와는 다르다.
이 색의 실마리는 300년 전에 있었다. 유리에 금을 넣어 붉은색을 내는 17세기의 골드 루비 공정이다. 금을 특정 용액에 녹여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흩어 놓으면 그 미세한 입자들이 빛을 흩뜨리며 색을 낸다. 안료를 섞어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금 입자의 존재 자체가 색이 되는 것이다. 당대에는 거의 마술로 여겨졌다. 12세기부터 유리로 이름을 떨친 베네치아 사람들조차 진정한 붉은 유리만은 끝내 만들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이 색은 여전히 까다롭다. 금 입자는 이상적인 크기와 형태와 농도를 지녔을 때만 원하는 색을 낸다. 수년의 연구 끝에 반클리프 아펠이 얻어낸 것은 핑크라는 이름 하나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색이다. 이번 핑크는 한 겹의 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투명한 층 안쪽으로 미세한 기포가 흩뿌려져 있는데 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라 어느 것 하나 같은 형태를 띠지 않는다. 일반적인 에나멜 작업에서 기포는 대개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흔적을 감추지 않고 소재의 표정으로 남겼다. 이 반투명한 층이 옐로 골드, 혹은 기요셰 옐로 골드와 만나면 금속의 표면이 아래에서 비쳐 올라온다. 에메랄드를 능가하는 빛 반사율이 여기서 나온다. 또한 각 모티프의 표면은 평면이 아니라 완만한 곡면이다. 빛이 한 점에 맺히지 않고 네 개의 잎 전체로 번지는데, 그만큼 만들기는 까다로워진다. 곡선형 에나멜 모티프를 골드 세팅에 정확히 안착시키는 일은 극도의 정교함을 요하는 공정이다. 모티프를 감싸는 두 줄의 골드 비즈도 마찬가지다. 반클리프 아펠의 시그너처인 그 윤곽은 인내를 요하는 세공과 폴리싱의 결과다.
테오필 고티에는 연약한 색을 에나멜 장인의 가마에 붙들어 매라고 했다. 반클리프 아펠이 이 핑크에 쓴 수년은 결국 그 일을 한 시간이었다. 들판의 클로버는 며칠이면 마르고 핑크빛 노을은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하지만 골드 비즈 안에 담긴 핑크는 변함없이 그대로다. 아무 일도 없는 평일 오후, 손목과 목에서 그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일. 사람이 아주 오래전부터 원해온 것이 결국 이런 것이었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Van Cleef & Arpels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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