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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OR'S CHAIR #6 주보영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존재감. 주보영은 장면의 길이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화면을 가득 채우며 시선을 붙드는 힘을 가진 배우다. 현재 그는 끊임없이 약동하며 자기 자신으로서의 뿌리를 깊숙이 내는 중이다. 푸른 잎사귀가 피고 단단한 기둥을 가진 나무가 되었을 때쯤 지금 이날들을 달게 추억하게 되기를.

프로필 by 안서경 2024.03.25
재킷은 Weekend MaxMara. 스트라이프 셔츠는 Vivienne Westwood. 안경은 Gentle Monster.

하퍼스 바자 <피라미드 게임> 반응이 좋아요. 어떤 경험이었나요? 다채로운 여자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잖아요.
주보영 정말 학교 같았어요. 같은 반 친구들 같은 느낌요. 특별 출연이라 4회차 정도 촬영했는데, 학교 장면을 몰아서 찍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어요. 그러면 몰입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학교 폭력 피해자로서 울분을 통하는 장면을 찍는데, 자신들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지 않아도 다들 저를 쳐다보며 에너지를 건네고 함께 호흡해줘서 고마웠어요. 진귀한 경험이었죠.
하퍼스 바자 그래서 그 장면이 그렇게 잘 나왔군요. 사실 부담스러운 장면이잖아요. 독백하듯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이라.
주보영 당시 <한 사람>이라는 독립장편영화를 마친 직후라 지쳐 있었는데, 그 상태가 오히려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개인적으로 일이 겹쳐서 어디로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기인데 마침 제가 맡은 캐릭터(조우리)의 최후의 발악 같은 순간이었잖아요. 애드리브도 넣어서 정말 길게 찍은 신이에요.
하퍼스 바자 순간 몰입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화보 찍을 때도 그렇고.

주보영 저는 그렇게 타고난 유형은 아닌 것 같아요. 긴장할 때마다 거울을 보면 도움이 돼요. 특히 오늘은 평소 안 해본 메이크업을 해서인지 제가 제삼자처럼 느껴져요. 슛이 들어가기 전 그 얼굴을 기억하려고 하죠.
하퍼스 바자 ‘코스티’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있잖아요. 따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고 있죠. 이러한 자신과의 거리 두기가 어떤 도움이 되나요?
주보영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게 저를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어요. 고마운 작용이죠.
하퍼스 바자 얼마 전 개인 유튜브도 시작했어요. 촬영, 편집까지 직접 다 하고요. “나를 더 알리고 싶어서” 시작했다고 영상에서 말하던데, 솔직해서 좋았어요.

주보영 이걸 대체 누가 볼까 했는데 일단 유튜브를 보셨다는 그 말씀이 정말 놀랍고 감사해요.(웃음) 저를 더 알리고 싶다는 마음도 생존과 연결돼요. 배우로서 살아남는 게 쉽지 않잖아요. 단기간의 보상을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고 주보영 아카이브를 쌓아나가고 싶었어요. 유튜브를 통해 당장 캐스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쌓이다 보면 제가 남긴 이미지와 목소리 등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하퍼스 바자 채널 이름이 <주보영은 공사 중>이에요. 배우 릴리 톰린의 “성공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라는 말에서 영감받은 것이고요. 처음엔 ‘공사 중’이라는 표현이 언뜻 자기부정적으로 들렸어요. 지금의 모습은 온전하다고 여기지 않는 걸까,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걸까.
주보영 아….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저는 저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다들 나처럼 사는구나, 안도감이 들었다고 할까요? 모두가 완벽하지 않구나.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성공’은 부자나 천만 배우, 유명세 뭐 그런 게 아니라 내면의 여유와 평온, 모든 사태 앞에서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그라미예요.(웃음)
하퍼스 바자 평온한 상태로 가고자 하는 길인데 아직은 서툴다는 의미이군요. 유튜브의 주보영은 있는 그대로의 주보영인가요?
주보영 맞아요. 최대한 솔직하게 다 보여드리려고 하죠. 하지만 스스로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상태는 코스티일 때예요. 코스티는 실수해도 괜찮아요. 오로지 나 혼자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기나 화보 촬영, 인터뷰는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아직 제가 그런 것들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서 일할 때 부담이 돼요. 하지만 코스티로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도 돼요. 기꺼이 망가뜨려도 되죠.
하퍼스 바자 코스티는 주로 어떤 작업을 하나요?

주보영 그림을 그려요. 하얀 캔버스 위에 오일이든 뭐든 같이 만나면 안 되는 재료들을 그냥 마음대로 섞어버려요. 지우기도 하고 덧칠도 하고. 그러면 오묘한 빛깔을 띠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그건 어떤 감정의 해소인가요?
주보영 분노, 불안, 초조 같은. 지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요.

드레이프 프린팅 톱, 스커트는 Julycolumn. 부츠는 Arket. 진주 체인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분노는 어떤 종류의 것이죠?
주보영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최근에서야 좀 받아들이게 됐어요. 예전에는 그걸 인정할 수가 없었거든요.
하퍼스 바자 주어지는 기회에 관한 얘기인가요?
주보영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자격지심일 수도 있어요. 어릴 때는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쉽게 판단했고 지레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고, 결국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느낀 분노였던 것 같아요. 자책감이 컸어요.
하퍼스 바자 사회에서 느낀 결핍과 불안, 불만족을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쏘는 방식으로 해소했군요. 그게 가장 쉬우니까요.
주보영 맞아요. 그게 다행히 그림이라는 건강한 방식으로 자리 잡은 거죠. 언젠가 너무 화가 났는데 마침 앞에 색연필이 있더라고요. 그걸 집어서 그리는데 색연필이 다 부러져버리는 거예요. 화 때문에. 그러면 안 부러지는 도구로 그리면 되겠다. 초등학교 때 쓰던 다 굳은 아크릴 물감을 찾아냈죠.
하퍼스 바자 상징적이네요. 부러지지 않는 것. 어찌 보면 유연한 상태를 원한 거잖아요.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요.
주보영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에서 제가 맡은 예지라는 인물이 생각이 올곧아서 부러지는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를 연기할 때 마음이 안 좋았어요. 결국 예지는 펜싱을 그만두기로 결정하잖아요. 그 용기가 부러웠어요. 저는 항상 저보다 대단한 캐릭터를 맡아왔거든요.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도 이쯤에서 연기를 그만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죠.
하퍼스 바자 아까 페르소나에 대해 얘기했듯 개인으로서의 나와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분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직업이어도 결국엔 직업이 나를 해치는 것 같아요.

주보영 맞아요. 거리 두기가 필요하죠.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의 태도도 조금 변했어요. 예전에는 거기 있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내려놓고 이젠 저의 역할에 더 충실하려고 해요.
하퍼스 바자 배우를 인터뷰하며 느끼는 건 각자의 방식으로 더 건강하게 오래 일할 수 있는 길을 저마다 찾고 있다는 것이에요. 마치 구도자처럼요. 그 과정의 절실한 끈덕짐까지도 배우라는 일에 포함된 것 같고요.
주보영 맞아요. 그래서 배우의 길을 선택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철부지에 머물렀을지 몰라요. 기술적으로 연기를 잘하시는 선배님들도 계시긴 하지만 저는 아직은 조금 바보같이 연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냥 다 나를 던져서요. 그래서 평소 저의 습관이나 성향이 연기에 묻어나요. 그러니 일상에서도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안 돼요.

러플 디테일 데님 드레스는 Moschino. 데님 부츠는 Ash.

하퍼스 바자 타인을 대하는 마음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주보영 애정이 생겼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사람한테 별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은 사람을 진실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니까 애정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최대한 티는 안 내려고 하죠.
하퍼스 바자 왜요?
주보영 갑작스러운 진심은 사람을 놀라게 하니까요. 상대한테 부담이 될 수도 있고 내가 가진 진심 그대로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고.
하퍼스 바자 배우가 된 뒤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나요?
주보영 완전히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천사같이 착한 사람’ 이런 느낌보다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앞으로 더 크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죠.
하퍼스 바자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나요?

주보영 부모님이 맞벌이를 오랫동안 하셨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엄마는 쉬는 날이 거의 없었어요. 한 달에 한 번, 화요일에 쉬셨죠. 그때마다 엄마는 절 서울극장에 데려갔어요. 어느 때는 엄마는 엄마 보고 싶은 영화, 저는 저 보고 싶은 영화 따로따로 보기도 했어요. 중학교 가기 전까지 그랬어요.
하퍼스 바자 특별한 추억이네요. 그때 봤던 영화 중 뭐가 기억에 남아요?
주보영 그건 정작 기억이 안 나고, 엄마와 극장에 같이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길 기다리던 순간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하퍼스 바자 그건 왜일까요?
주보영 설레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요?

주보영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호텔 경영 전공이라 호텔에서 일을 했는데, 거기서는 제가 최고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일하는 내가 단조롭게 느껴졌거든요. 내가 꾸준히 하고 싶었던 게 뭐였지? 떠올려보게 됐죠. 엄마는 과일 가게를 오래 하셨는데, 시장 앞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면서 상황이 좋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영상에 담아보고 싶었고, 그러려면 촬영을 배워야 하나, 일단 현장에 가볼까 생각하게 됐어요.
하퍼스 바자 그렇게 영화 현장에 입성하게 됐군요.
주보영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에서 보조 출연으로 현장에 갔어요. 단역이죠. 그후 열심히 오디션 찾아 보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하퍼스 바자 그 과정은 수월했나요, 녹록지 않았나요?
주보영 아무리 지원해도 오디션의 기회를 얻는 것조차 어려웠어요. 간신히 오디션장에 갔을 때 그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프로필 느낌과 실제가 많이 다르다.
하퍼스 바자 프로필 사진부터 당장 바꿨어야죠.(웃음) 배우 주보영을 아직 모르는 분들에게 자신의 어떤 작품을 추천하고 싶어요?
주보영 솔직히 도저히 고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최근작인 <피라미드 게임>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 속에는 가장 최신의 주보영이 담겨 있으니까.
하퍼스 바자 스스로 생각할 때 주보영은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주보영 대답을 못하겠어요.
하퍼스 바자 왜일까요?
주보영 전 언제나 모든 걸 확실히 잘 알고 싶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나에 대해 확실히 뭘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퍼스 바자 주보영은 뭐든 확실히 알고 싶은 사람인데 아직 스스로에 대해서는 모르겠는 사람이네요. 그렇다면 배우로서 현재 위치는 어느 쯤인 것 같아요?
주보영 이제 시작이고, 아직 신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10년을 해왔으니 잘하고 있는 것이다. 잘 버텼다. 기특하다.
하퍼스 바자 한눈팔지 않고 진지하게 한 길을 걸어온 거니까요.
주보영 네, 뚜벅뚜벅 천천히.
하퍼스 바자 지금 가장 나를 타오르게 하는 건 뭐예요?

주보영 항상 변함없이 그건 작품인 것 같아요. 앞으로 만나게 될 작품 생각요. 언제 어떤 작품을 만날까 하는 기대감이 커요. 그런데 그게 너무 뜨거워서 가끔 저를 태워버리기도 해요.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김현민
  • 사진/ 김용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스타일리스트/ 김경선
  • 어시스턴트/ 조혜원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