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돌아온 아트 위크엔 이 전시를

대전과 서울, 광주까지. 놓치면 아까울 9월의 주요 전시들.

프로필 by 고영진 2025.08.26

THE LIST



사진: 대전시립미술관 제공

사진: 대전시립미술관 제공

모순이 공존하는 풍경

2023년 5월 방콕에서 열린 전시의 일환으로 발행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책 <태양과의 대화>는 오픈 AI의 GPT-3 모델을 사용해 만든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소소한 대화가 오가지만 텍스트의 이질적인 요소를 조화롭게 조정하거나 드러난 모순을 해결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다. 이런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는 위라세타쿤의 영상 세계로 이끄는 구심력이다. 국내 국공립미술관에서 소장한 위라세타쿤의 작품을 한 곳에 모았다. 로모키노 카메라로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잿가루>, 영화 <찬란함의 무덤>의 주요 배경인 살라 케오쿠 조각 공원에서 촬영한 <불꽃(아카이브)>, 영화 <메모리아>의 위성 작품 <두르미엔테>와 사카모토 류이치와 협업한 <에이싱크-퍼스트 라이트>를 결합해 2채널 비디오로 완성한 <두르미엔테 & 에이싱크>가 9월 2일부터 12월 21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에서 상영된다.


야광, <날 것의 증거>, 2024, 퍼포먼스. 사진: 홍지영, 작가 제공. ⓒ 야광

야광, <날 것의 증거>, 2024, 퍼포먼스. 사진: 홍지영, 작가 제공. ⓒ 야광

미술관 바깥에서 젠더 허물기

아트선재센터는 기획전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를 8월 26일부터 10월 26일까지 국제갤러리 K2와 (투게더)(투게더)에서 개최한다. 2023년에 열린 «오프사이트»는 아트선재센터 내외부 공간, 한옥 앞마당부터 옥상 정원까지 관람객이 눈여겨보지 않던 미술관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아트선재센터 바깥으로 나아가 사회적 맥락이 투영되는 장소로서의 몸으로 확장한다. 젊은 젠더 퀴어 아티스트들의 다층적 작업을 통해 퀴어 서사를 모색한 전시는 몸을 권력과 역사 혹은 억압의 트라우마가 각인되고 수행되는 장소로 바라보게 해준다. 11팀의 참여 작가는 영상, 퍼포먼스,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신체를 기반으로 한 젠더 정체성과 변화하는 기술 환경 등을 감각적으로 탐구한다.


김창열, <현상>, 1971, 캔버스에 유화물감, 161x13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창열, <현상>, 1971, 캔버스에 유화물감, 161x13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물방울이 응축한 것은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2022)에서 50년간 묵묵히 물방울을 그려온 작가는 침묵을 깨고 천천히 입을 연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다.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우는 거다. 내게 그림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물방울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창열은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를 설립하고 한국형 앵포르멜 미술을 주도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뉴욕 체류 시기를 거쳐 방황 끝에 1970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파리 근교의 인적이 뜸한 작업실에서 우연히 캔버스에 묻은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비치는 것을 보고 매료되었다. 1972년 처음 물방울을 그린 <밤에 일어난 일>로 주목받은 후 2021년 작고하기 전까지 평생 한 가지 주제에만 천착했다. 영화 속 고백대로 그의 작업은 마치 구도자의 길을 걷듯 전쟁에 대한 상흔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이번 전시는 초기 작업부터 미국, 프랑스를 거쳐 말년에 이르기까지 물방울과 함께한 창작 여정을 집대성한다. 김창열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해 새롭게 조명하는 회고전은 8월 22일부터 12월 2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


Ryoji Ikeda, <Point of No Return>, 2018. photo by National Asian Culture Center

Ryoji Ikeda, <Point of No Return>, 2018. photo by National Asian Culture Center

데이터의 우주를 빚다

“음악은 공기의 진동”이라고 정의하는 오디오비주얼 아트의 선구자 료지 이케다는 데이터를 감각을 일깨우는 미학적 재료로 다뤄왔다. 1996년부터 덤 타입(Dumb Type)과 협업하면서 다감각적인 설치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소리와 빛,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작업은 관람객과 함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은 단순히 감각적 자극을 받는 수동적 위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나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인체의 DNA 정보를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변환한 <data.flux [n˚1]>부터 선택된 데이터가 흐르고 바뀌는 과정을 확인하는 <data.gram [n˚8]>까지 8개의 작품을 차례로 경험할 수 있다. 료지 이케다 개인전의 하이라이트는 <data-verse 1/2/3>으로, NASA, 인간 게놈 프로젝트 등에서 수집된 과학 데이터를 소재로 제작되었다. 세 개의 대형 스크린과 고주파 사운드를 통해 미세한 세포부터 광활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여러 규모의 데이터를 동시다발적으로 수용한다. 디지털이 빚어낸 초감각적 체험을 12월 28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만끽해보자.


루이즈 부르주아, <마망>, 1999, 2023년 호암미술관 야외 정원 설치 전경. 사진: 호암미술관 ⓒ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루이즈 부르주아, <마망>, 1999, 2023년 호암미술관 야외 정원 설치 전경. 사진: 호암미술관 ⓒ The Easton Foundation/Licensed by SACK, Korea

상처 입은 영혼을 끌어안는 여자

거대한 거미 조각 <마망(Maman)>으로 사랑받아온 현대미술의 선구자 루이즈 부르주아의 회고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난 부르주아는 내로라하는 거장들 밑에서 견습생을 거친 후 1938년 뉴욕으로 이주해 1940년대부터 유목을 활용한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1950년대에 미국 추상 예술가 그룹에 참여하면서 주제와 소재 측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 최초의 여성 조각가였던 그는 2010년 뉴욕에서 작고하기 전까지 설치, 조각, 회화,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독보적인 작품을 창작해왔다.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은 전 생애에 걸친 작품 110여 점을 모았으며,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췄다. 부르주아는 유년기의 불행한 기억과 트라우마를 출발점으로, 인간 내면의 감정과 욕망, 섹슈얼리티와 육체 등을 밀도 있게 연구했다. 1940년대의 초기 회화와 1940~50년대 <인물(Personages)> 군상부터 대형 <밀실(Cells)> 시리즈와 자기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담은 후기 섬유 작품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에 걸친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동시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부르주아의 작업과 예술적 열정을 8월 30일부터 내년 1월 4일까지 호암미술관에서 조망한다.


조광민(한국과학기술원), <특수 재난 대응 이동식 병원(Special Disaster Response Mobile Hospital)>, 2025. 사진: 광주비엔날레 제공

조광민(한국과학기술원), <특수 재난 대응 이동식 병원(Special Disaster Response Mobile Hospital)>, 2025. 사진: 광주비엔날레 제공

모두를 위한 디자인

디자인은 너와 나, 우리를 하나로 연결한다.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는 «너라는 세계: 디자인은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는가»이다. 포용디자인(Inclusive Design)을 화두로 ‘세계, 삶, 모빌리티, 미래’ 네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보편적인 디자인(Universal Design)을 확장해 포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디자인을 추구한다. 포용디자인은 형태와 기능을 넘어 사회적·문화적·감성적 요소까지 아우른다. 볼리에레 아페르테의 <부유하는 둥지>는 해수면 상승에 대응하는 부유 구조물로 지식의 도서관을 표방하고, 다니 클로드의 <세 번째 엄지손가락>은 손에 추가로 장착하는 로봇 보조 엄지손가락으로 인체 기능을 강화한다. 또한 조광민(한국과학기술원)은 재난 상황에서 절실한 의료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동형 팝업 병원(<특수 재난 대응 이동식 병원>)을 설계했다. 8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광주비엔날레전시관에서 포용지덕의 디자인을 확인할 수 있다.


Antony Gormley, <NOW>, 2024, 8mm Corten steel, 274x594x216cm. Photograph by Stephen White & Co. ⓒ the artist

Antony Gormley, <NOW>, 2024, 8mm Corten steel, 274x594x216cm. Photograph by Stephen White & Co. ⓒ the artist

이곳은 정지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조각은 정지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이 멈춰진 공간에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을 투영해 작품과 교감하길 바랍니다.” 지난 6월, 뮤지엄 산의 상설전시관 ‘그라운드’에서 안토니 곰리가 건넸던 환영의 인사처럼 교감은 지속된다. 뮤지엄 산의 개인전 «Drawing on Space»에 이어 다시 인간의 몸을 중심에 둔 조각과 하나가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곰리의 개인전 «불가분적 관계(Inextricable)»는 화이트 큐브와 타데우스 로팍이 공동 기획했다. 화이트 큐브에서 소개되는 <벙커(Bunker)> <비머(Beamer)> <블록워크(Blockwork)> 시리즈에서 신체는 건축의 문법을 통해 변형되고 재구성된다. 타데우스 로팍에서 전시되는 <익스텐디드 스트랩워크(Extended Strapworks)> 시리즈에서 조각은 신체의 경계를 넘어 뻗어 나간다. 선형적이고 개방적인 작품은 신체가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주체와 환경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심신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도록 일깨우는 예술을 지향한다. 인간의 신체가 거주 환경의 건축 구조와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를 하나의 실체로 경험하게 만든다. 화이트 큐브에서 9월 2일부터 10월 18일까지, 타데우스 로팍에서 9월 2일부터 11월 8일까지 우리의 감각적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전종혁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바자 아트>를 위한 전시 ‘리스트’를 작성한 후 한 곳도 빠짐없이 미술관 순회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Credit

  • 글/ 전종혁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