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노상호가 이룩한 '홀리'한 세계
5년 만에 개인전 《HOLY》를 연 작가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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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호 하나의 주제나 방식에 꽂히면 일단 매일 하나씩 완성을 볼 만큼 몰입하는 편이다. 작업량이 쌓이면 뭉쳐진 더미 속에서 정리를 시작한다. 2018년 개인전을 마치고 그사이 3D 작업과 신작을 시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기존에 해왔던 걸 다시 내보이는 게 사실 좀 겁났다. 마음속에서 이게 맞는지 고민하다 변화한 결과가 모이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하퍼스 바자 지난해 아라리오 갤러리 재개관 그룹전에서 <HOLY> 시리즈의 회화와 3D 프린팅을 적용한 토끼 모양 조각을 선공개 했다. 지금 이 작업실에도 장롱 모양의 설치작품과 또 다른 토끼 조각이 눈에 띈다.
노상호 신관의 3개층(1층, 3층, 4층)을 쓴다. 1층은 층고가 높아 대형회화들이 걸리고, 3층은 회화로, 맨 위층에는 장롱을 활용한 설치작품과 3D 조각 등을 자유롭게 배치하려 한다. 3D 프로그램을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화면 안에서 한 대상을 여러 각도로 보다 보니 자연스레 조각의 형태를 떠올리게 되었다. 조각의 마감은 늘 에어브러시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 캔버스의 또 다른 형태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퍼스 바자 오랜 기간 선보여온 연작 <더 그레이트 챕북(The Great Chapbook)>은 웹상에서 소비되는 이미지들을 캡처해 인쇄한 다음 먹지를 활용해 회화로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이번 시리즈 또한 다양한 이미지를 수집하는 시작은 같다. 단, 챗GPT의 이미지 버전인, AI 프로그램 달리와 미드저니를 통해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이 더해졌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에서 더 좁혀진 과정이 <HOLY>다. 전자는 웹에서 본 이미지들을 때려넣은 것에 가까웠다면, <HOLY>는 “웹에 이런 현상이 있는데 계속 보다 보니,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라고 표현한 것에 가까운 전시다. 구작에도 사슴이나 눈사람이 등장했는데 관객들이 연결해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수집한 이미지를 AI로 재생성해 아이디어를 얻는 데 활용하고, 포토샵이나 3D 툴로 내 의도대로 배치한 다음 이를 캔버스에 옮긴다. 가령 회화의 배경은 오늘 AI가 만든 동유럽의 한 마을 풍경에, 사슴은 그 전날 AI가 만든 걸 다시 합성하는 식이다. 내 스스로 AI가 되어 이미지를 다시 만드는 것처럼 레이어를 더한다. 사람이 몇 시간 고민하던 아이디어가 몇 초 만에 나온다.
하퍼스 바자 이름에서 작업이 성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동물이나 눈사람, 해골 고스트 등이 애니메이션 같은 인상을 준다.
노상호 눈사람 그리고 흔히 ‘영물’이라 불리기도 하는, 신비스러워 보이는 동물들이 이번 시리즈에서 주를 이룬다. 앞서 말한 대로 AI가 생성한 3D 이미지 속에서 눈은 불이 나도 절대 녹지 않고, 눈사람은 사람보다 더 거대한 크기가 될 수 있다. 현실과 다른 그 모습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생전 가보지 못한 장소에 전혀 생뚱맞은 동물들이 출연하는 광경처럼 이질적인 조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하퍼스 바자 개인적인 감상으론 이전 작업에서 인물들이 놓인 시점이 불교회화 같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는 대상이 중앙부에 놓이면서 좀 더 가톨릭이나 기독교 회화 같은 느낌도 든다.
노상호 회화는 태동부터 종교화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지 않나. 그 시대의 작업을 보는 걸 좋아해서 여행을 가면 현대미술관도 가지만, 중세 회화를 즐겨 본다. 그 취향이 나도 모르게 반영된 걸지 모른다. 테두리의 곡선을 중세 회화의 액자 프레임을 따서 반영하거나, 파란색을 쓸 때 울트라마린 컬러를 고르기도 했다. 지금은 윈도우 에러 창에 쓰이는 색인데, 중세에는 너무 귀해서 중요한 그림에만 바르던 색이다.
하퍼스 바자 에어브러시를 쓰는 다른 작가들은 쨍한 컬러를 쓰는 반면, 톤이 마치 필름 사진처럼 한 톤 균일하게 어두워진 같기도 하다.
노상호 AI가 만든 이미지들을 보다 보면 오래된 영화에서 캡처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는 걸 감지할 수 있다. AI는 결코 아날로그가 되지 못하는 존재인데, 거기에 콤플렉스가 있어선지.(웃음) 사실적으로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도 종종 오류가 난다. 바이크의 앞바퀴가 두 개가 되거나, 오류를 없앤 곳의 픽셀이 깨져 있거나. 그게 재미있어서 작업에 그런 디테일도 반영하려 한다.
하퍼스 바자 작품마다 따로 제목을 정하지 않는 이유를 “이미지 자체가 내러티브이기에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전작의 내러티브가 옴니버스식 극의 열린 결말 같았다면, 이 시리즈는 시놉시스가 있는 것 같다. “어느 마을에 눈사람이 불타고 있다”처럼.
노상호 요즘 시대가 ‘세계관만 남아 있는 월드’라는 생각을 한다. 다들 구체적 스토리는 따로 없이 콘셉트를 고민하는 것에만 열중한다. 내러티브가 사라진 세상이 되면서 나도 그걸 지우려 한 것 같다. 숏츠 같은 콘텐츠도 편집한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떼어내 보여주지 않나. 모두가 기승전결은 관심 없는 것처럼.
하퍼스 바자 2022년 말부터 인공지능을 적용한 이미지 프로그램이 확산되었는데, <HOLY>는 그걸 바로 적용한 결과물이다. 3D 영상 툴을 포함해 새로운 툴을 배우는 걸 재미있어 하는 편인가 보다.
노상호 나는 매일 내 시야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영상을 시작한 이유도 매일 영상을 보는데 시작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움에 강박이 있어서 목적 없이 익히고 만들었다. 그러면서 3D가 주는 어떤 미감 같은 게 내 안에 들어왔고, 시대적인 미감과 반응하다 보니 이 시리즈가 탄생한 것 같기도 하다.
하퍼스 바자 혁오의 앨범 커버로 알려진 작가였는데 이제 K팝 시대와 함께 애스파, 뉴진스 등 3D 영상 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노상호 맞다. 리릭 비디오, 팬을 위한 포잉 영상 등 3D 영상 소스는 참 다양하다.(웃음) 비주얼 디렉팅 스튜디오 ‘pic’을 따로 운영 중이라 분리해두었다. 미팅 때 내 원래 작업을 몰랐다는 사람도 있어 놀라기도 하고.
하퍼스 바자 <바자>와도 창간 20주년, 24주년 기념 축하 커버를 장식하는 등 인연이 깊다.
노상호 특히 보테가 베네타와 협업한 24주년 커버는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컬렉션의 거의 모든 착장이 들어 있었으니까 비슷한 작업 의뢰가 많았다.(웃음) 웬만한 패션 필름이나 쇼는 거의 다 본다. 아까 말했듯 작품에 종교적인 도상이 반영된 이유도 생각해보니, 요즘은 패션 브랜드에서 그런 코드를 아무렇지 않게 차용하는 일이 자주 보이고, 젊은 세대들이 그런 이미지를 잘 소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고스 룩에 산리오 키링을 다는 식의 이미지가 지금 많이 보이니까. 그런 흐름을 반영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HOLY>, 2023, Acrylic on Canvas, 130.3x193.3cm.
노상호 인스타그램으로 항상 전시를 한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에게 내보여야겠다는 욕구가 적기도 했다. 실제 전시는 돈도 더 많이 들고.(웃음) 몇 년째 그림을 올리다 보면 올리기 전에 대략 예측할 수 있다. 이 눈사람 그림은 ‘좋아요’ 수가 1천2백 개가 나오고, 저 아래 그림은 5백 개 정도일 거다, 하고. 농담 삼아 갤러리스트들과 만날 때도 “이 그림을 더 좋아할 걸요?” 말하기도 한다. 작업할 때 내 기준이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꾸준히 올리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타인의 반응에 휘둘리고 싶지 않고 정확히 내 눈으로 알고 싶은 욕구다. 한편으론 현대사회에서 인플루언서의 얼굴과 내 작업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퍼스 바자 과거 인터뷰에서 “미술을 미술로 보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하며 미술계를 넓게 보는 시각을 드러냈는데, <바자 아트> 21호에서 인터뷰한 큐레이터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르기예프 역시 동일한 말을 한 적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미술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노상호 어떤 현상을 민감하게 보고 그걸 시각적으로 해석해내는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결론과 태도를 갖고 있다면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게임이든, 인스타그램 속 사진이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문학도, 음악도 다 그렇지 않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화가니까 시각을 빗대어 말하는 거다. 현재 미술계에서 다루는 미술은 ‘전통과 시장이 반응하는 선에서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장르화되어 있는 거다. 미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더 미술 같은 장르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분리해 생각하려 한다.
하퍼스 바자 인공지능 시대에 AI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서 당신에게 그리는 행위란 어떤 의미인가?
노상호 매일 한 점의 드로잉을 그리는데, 왜 그렇게까지 작업을 하는지 생각해보면 확실히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밖에 답하지 못하겠다. 몇 년 동안 3D 작업에 몰두하면서 나는 손으로 하는 걸 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상에서만 작업할 수 없고, 그걸 반드시 현실로 호출하는 작업까지 해야 하는 사람. 주위에서 디지털 페인팅만 하면 어떠냐는 조언도 들어봤지만, 나는 양쪽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감각을 느껴야 하고 그 양가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다. 낀 세대의 감각이랄까.
하퍼스 바자 창작자는 작업 당시의 상태가 작품에 반영된다고도 하는데, 당신의 작업은 방법론 자체가 워낙 확고해서 그럴 틈이 없겠다.
노상호 매너리즘에 빠져 아웃풋이 안 나오는 걸 너무 싫어하고 경계하는 편이다. 슬럼프는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아본다. ‘이땐 힘들어서 그림이 잘 안 나왔구나’ 하고. 타율이 잘 나오는 걸 중요시하는 작가라고 농담 삼아 얘기한다. 그게 작가로선 홈런은 안 치고 확률만 높이는 것 같아 고민한 적도 있지만, 뭐 어쩌겠나. 성향이 이런 것을.(웃음)
하퍼스 바자 어린 시절부터 보는 것에 민감한 아이였나?
노상호 집안에 미술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도 없고, 반대도 컸다.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어린이긴 했다. 어머니 옆에 붙어 요리하길 좋아했고, 옷 만들고. ‘싸이월드로 배운 미술’이란 말을 자주 해왔는데, 중고등학교 때 직접 미술관에서 작품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싸이월드나 커뮤니티 클럽 같은 데에 업로드된 작가 이름도 어떤 역사에 근거한지도 모르는 이미지를 컴퓨터에 저장하는 식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 한참 지나 유럽에서 처음 작품을 실견하고 놀란 거지. 거기서 이상한 간극을 느끼기도 하고. 미술이 뭘까, 눈으로 작품을 못 봤으면서도 좋아하고 전공을 삼는 게 웃기지만 나에게 시각적 경험이란 건 이런 총체적 경험에서 기인한 거다. 내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런 루트를 따랐을 거다.
하퍼스 바자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작가로서 품고 있는 궁극적인 판타지가 있나?
노상호 매번 같다.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것. 스스로 재미있어야 지속할 수 있을텐데 어떻게 이 흥미를 계속 옮기며 유지할 수 있을까. 매일 작업을 하니까 하루 단위로 계산하게 된다. 완벽한 하루를 엄청 갈망하는 편이다. 아침에 햇빛에 눈이 부신 채 일어나 드로잉을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 그러려면 집이 남향이어야 하고, 원하는 부엌의 형태가 충족되어야 하고 작업실이 가까워야 하는 세부 조항이 붙겠지.(웃음) 그런 하루를 오래도록 반복할 수 있길 바란다.
※ 노상호 개인전 «HOLY»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2월 29일부터 4월 20일까지 열린다.
Credit
- 사진/ 방규형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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