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바자 코리아'의 29살을 축하하며 보내온 것들

노상호부터 구본창까지. '바자'와 만났던 10명(팀)의 창작자들로부터 받은 10가지 모양의 축하.

프로필 by 안서경 2025.08.02

생일축전


<바자>의 스물아홉 생일을 맞아 각별한 인연이 있는 열 명(팀)의 창작자에게 축하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리고, 짓고, 고른 무언가를 선뜻 건넸다.



화가 노상호

“최근 작업을 이어온 <HOLY> 연작에 자주 등장하는 ‘불타는 눈사람’이 생일 케이크를 든 모습으로, <바자>의 29주년을 표현해보았습니다.”

<HOLY>, 2025.


사진가 구본창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장미의 붉은빛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패션의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는 <바자> 코리아의 여정도 그처럼 변치 않기를 기원합니다.”

<Untitled>, 2004.


서정

키티 화이트는 1974년 11월 1일 영국 잉글랜드 남부에서 태어났다. 화이트 씨가 만 29세가 되던 11월 1일 인천은 18.6도, 최고기온 26.1도에 일강수량은 측정되지 않은 온화한 날씨였다. 귀에 리본을 단 지 10951일하고도 하루가 되던 참이었다.

바스라뜨려 죄송합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어슬렁거리던 고양이였다. 가게 상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곤 했다. 긴 몸체의 배들이 항구를 서성였다. 배들이 흘러가듯 차들도 도로를 따라 흘렀다. 화이트 씨의 생일 날 서정은 차를 타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머리의 서정은 만 열한 살 생일부로 죽 단발머리를 고집했다.

키티 화이트는 피아노를 유독 잘 쳤다. 바이올린도 좋아했지만 뭉툭한 손으로 명쾌한 울림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자동차는 상가 건물을 지나친다. 3층의 피아노 학원이 보인다. 어릴 적엔 간판이 더 깨끗했던 것 같다. 혹은 그 당시에 미처 간판을 읽지 못했을지 모른다.

색연필이 스프링을 따라 돌아갔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이 사과를 가리키며 색깔을 칠해오라고 했다. 서정은 키티 화이트가 그려진 색연필로 사과를 칠했다. 기다란 색연필이었다. 작은 손으로 쥐기 어려운 연습실 안에서 서정은 배꼽 때를 뺐다. 화이트 씨는 피아노를 칠 때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흰빛의 피아노였다. 서정은 여전히 배꼽 때를 빼고 있었다.

조각난 음악소리가 흘렀다. 가끔 뚱땅거리기도 했다. 서정은 미와 파를 구분하지 못했다. 몇 개의 음은 같은 순간에 조화롭고 다른 순간에 삐걱거린다. 원장 선생님이 연습실 문을 여는 순간 서정은 화들짝 놀라 배꼽에서 시선을 뗐다.

사과는 핑크색으로 굴러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찾을 수도 없었어요.

선생님은 연습실 문을 닫고 가버렸다. 시간이 흘러도 키티 화이트를 기억했다. 서정은 그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키티 화이트가 영국의 햇빛을 맞으며 하품을 했다. 곧바로 구름이 가렸고 약하게 비가 쏟아졌다. 간판을 지나친다. 배꼽이 함께 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시인 윤지양

“저의 스물아홉 생일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누군가의 축하를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보냈겠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누구나 다 아는 키티 같은 캐릭터도 생일이 있답니다. 벌써 오십이 넘었대요. 변함없을 것 같은 캐릭터도 해마다 생일을 맞이합니다. 그 안에 스물아홉 생일도 있었을 테고요. 그 시기에 살아간 서정이란 가상의 인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의 변치 않는 기억과 함께요. 스물아홉이 되어서도 변치 않은 <바자>의 기억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드려요.”


뮤지션 바밍타이거

“<하퍼스 바자> 코리아의 창간 2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8월에 태어난 <바자>를 위해 여름의 소리를 담은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했어요. 바밍타이거가 전하는 음악들과 함께 이 무더운 여름을 더욱 진하게 느끼고 즐기시길 바랍니다.”

<Summer Playlist from Balming Tiger>

밤 소리, 매미 소리, 자연 소리 예약 - ‘즐거운 밤 (루프)’

힐링 네이쳐 - ‘절고개 능선의 매미소리’ (Healing Nature - ‘The Cicada Sound of Jeongoge Ridge’)

Francesca Heart - ‘A’marina’

Silvia Kastel - ‘Mantide’

Animal Collective - ‘Love on the Big Screen’

Two Lone Swordsmen - ‘The Big Clapper’

Broadcast, The Focus Group - ‘The be Colony’

Ratatat - ‘Supreme’

Leon Vynehall - ‘Ecce! Ego!’

Jefre Cantu-Ledesma - ‘Songs of Forgiveness I’


화가 김참새

“제 페인팅 작업 중 하나인 애니멀 시리즈의 일환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스물아홉 생일을 맞은 강아지 ‘바자’를 위해, 친구인 ‘하퍼스’가 축하해준다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사랑하는데, 그런데

고백해도 됩니까? 바자를 우러러보았어요. 저도 에디터였거든요. 매달 기획 회의 준비할 때마다 바자를 넘기며 영감을 얻곤 했어요. 저는 어렸고, 당연히 경험도 적었죠. 하지만 뭐가 좋은지는 알았어요. 천재였으니까요. (과거형입니다.) 특히 제목이나 전문의 문장이 매혹적이어서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시의 문장에 붙여보면서 다듬어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제가 시인이기도 하거든요. 바자를 볼 때마다 배송 박스에서 커다란 사과를 꺼내는 기분이 들었어요. 당시 에디터 선배들 이름을 지금도 기억해요. 제 연예인이었던 분들. 일부는 후배였을 텐데, 브랜드 행사에서 만나서 “선배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기도 했어요. 나보다 일 잘하고 글 잘 쓰면 선배죠, 뭐.

바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적도 있어요. “이우성 에디터시죠? 간단히 멘트 받을 게 있는데 통화 가능해요?” “바자요? 멘트요? 멘트가 뭐죠?” 마감하느라 사흘째 근처 찜질방과 사무실을 오가며 지내는 와중이었는데, 놀라고 신기해서 하루 종일 자만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 나 바자에 멘트 요청 전화 받는 에디터~ 이우성~ 오, 잘나가는 에디터.’

그리고 지금은 바자의 스물아홉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명망 있는 필자가 되었나 봅니다. 자만입니다. 시인으로서 적어달라고 했지만, 한때 에디터였고, 여전히 에디터라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자아로 적고 싶어요. 이 글의 청탁 메일에 대한 답변으로 저는 이렇게 적었어요. “바자는 왜 예전만큼 설레지 않죠? 야성의 회복을 염원하는 글을 써볼게요.” 하지만 곧 후회했어요. 저의 언어와 태도에 대해. 사실 최근의 바자를 자세히 본 적이 없거든요. 2023년 4월호에 편집부 요청으로 지드래곤 인터뷰를 제가 했는데, 그때 몇 년 만에 본 거였어요. 심지어 그 인터뷰가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제 일도 제대로 못했으면서 무슨, 옛날이 좋았다는 푸념이나 늘어놓는 걸까요. 막연히, 나 때는 말이야 낭만이 있었고, 문장과 이미지에 대한 진심이 있었다고 지루하게 읊조리는 거죠. 한때의 영화에서 살고 있는 성인 남자. 그러니 회복되어야 할 건 고루해진 나의 마음이겠구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랑하는 겁니다. 손발 오그라들지만, 바자라는 매거진을 스무 살에 사랑했고 서른 살에도 사랑했고 마흔인 지금도 사랑하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마흔여섯 살. 아, 그리고 바자는 제가 에세이를 출간했을 때 기사도 실어주었어요. 그걸 보고 십년 만에 연락을 해온 친구가 “사진이 아무리 봐도 잘생긴 게 너 같지가 않았어”라고 이야기한 걸로 짐작하건대 제가 여전히 미남인가 보죠. 네, 쓸모없는 이야기는 그만 적겠습니다

아니야, 하나만 더. 바자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왜 저 안 부르셨어요? 지금은 어떠세요? 나이가 좀 많지만, 보시다시피 글도 잘 쓰고요, 기획도 할 수 있어요. 또 시인답지 않게 ‘디지털’ 환경에도 기민하게 반응합니다. 어쩌면… ‘관종’입니다. 그리고 나이보다 7~8세 어려 보입니다. 후배여도 상급자라면 받들어 모실 의지도 있습니다. 생일 축하 글을 쓰기로 한 건데, 연애 편지가 되었네요.

시인이니까 시를, 써야겠죠?

바자는 나의 용기

오후에 거실에 앉아 잠깐 졸았는데 빛이 정원을 만들었어요

풀들 사이 좁은 길을 따라 한동안 걸었고 소리가 시작되는 8월의 나무 앞에서 멈추었어요

저는 우주의 모든 기적을 음악으로 들려주는 친구를 알고 있어요

손바닥에 이름을 적고 양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무성한 용기가 흘렀어요


시인·에디터 이우성

“최근 출간한 제 책 <친구는 나의 용기>를 차용해서 써봤어요. <바자>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기적 같은 바람이 <바자> 편집부와 <바자>를 보는 모든 분에게 불기를 기도합니다. 빙산처럼 거대한 시원함으로. 희망의 언어와 마구 솟는 용기로. 내 친구, <바자>.”


사진가 민현우

“사람들의 시간이 머물다간 자리는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자라날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바자>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보고싶습니다.”

<남해 여행>, 2024.


천재와 요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상의 <날개>.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헛헛한 마음까지도. 2001년 가을이었고 수험생이었지. 아마 이쯤부터 너는 천재가 되고 싶어 했어.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랐지. 천재가 될 수 있다면 스스로를 박제시켜도 좋으리라 생각했지. 너도 알지? 이 박제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귀속되는 것. 이상은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잖아. 공교롭게도 시인 윤동주가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을 때의 나이도 스물일곱이었어.

그리고 이들보다 이르게 태어나 조금 더 이르게 떠난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다짐하는 한(恨)의 정서만으로 소월을 납작하게 설명할 수 없지. 스스로 품고 있던 내면의 어둠만큼이나 그는 환하고 밝은 빛을 가진 영혼이었잖아. 그래서 일찍이 네가 좋아한 것이고. 그도 “밤마다 자리를 펴고 누워서 잘근잘근 이불깃 깨물어” 가며 누군가를 그리워했어. 당대 사회에서 귀하고 값비싼 자전거를 사고는 사랑하는 이에게 가겠다며 이른바 플렉스(Flex)를 즐기던 젊음이었고. 물론 그 역시 자신의 젊음을 스스로 박제시키고 말았지.

요절한 천재 시인들의 행렬에서 언제나 가장 앞서 걷고 있을 법한 이는 김관식이야. 김관식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지? 남들이 하고 사는 일은 다하고 살겠다며 네가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이름이니까. 김관식은 작품이든 삶이든 극단으로 밀어붙인 시인이야. 다른 미사여구 없이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적은 명함을 들고 다녔지. 4·19혁명 이후에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후일 부통령이자 총리를 지낸 장면과 맞붙기도 하고. 그는 천재다운 사회성으로 문단의 원로든 후배든 남성이라면 모두 공평하게 군(君)이라 칭했어. 김관식마저 천재답게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미당 서정주는 다음과 같은 애도를 남겼어. “세상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욕만 퍼부으며 철저한 자존과 고독과 깡소주로만 살다가 완전히 폐가 녹아 스러져간 젊은 사내, 김관식이를 시인으로 추천한 것을 나는 한동안 후회했으나, 이제는 후회 안 해도 되는가? 또다시 우리를 괴롭게 울리며 죽어갈 염려는 없어졌으니까….”

요절한 천재 시인들의 행렬에서 가장 후미에 걷고 있을 이는 기형도야. 보폭이 짧거나 걸음이 느려서가 아니지. 그는 두리번거리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니까.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는 쓰고 또 쓰다가 스물아홉 해 만에 세상을 떠났어.

스물아홉 여름의 너는 마냥 혼란스러울 거야. 십 년 가까이 시를 써왔지만 아직 시집 한 권 내지 못했잖아. 천재는커녕 수재나 우등생 소리도 한번 못 들었잖아. 어떠한 성과도 없이 시간만 야속하게 흘러 더 이상 요절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서른을 앞두고 있잖아. 생각은 드높은데 눈앞은 바닥이라 마음만 앞서고 있잖아. 그래서일까. 너는 흰 쌀밥 대신 맑은 독주를 마시고 잠을 사치라 여기며 스스로를 모질게 대하는 방식으로 시인임을 증명하려 하고 있지. 예술은 못 하고 예술가병만 자처해서 앓고 있지.

그런데 말이야. 너도 곧 깨닫게 되겠지만 미학의 추구와 삶의 진보는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니었어. 길든 짧든 깊은 잠을 자고 소박하지만 정갈한 끼니를 챙기고 따듯한 물을 많이 마시는 것. 말하거나 쓰는 일보다는 듣고 읽는 일을 우선으로 하는 것. 모든 일의 시작은 이토록 단순하고 간명한 것이었어. 천재든 요절이든 동경할 수는 있지만 경도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물론 지금의 너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한 시절을 온몸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정직하게 통과한 사람만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으니까. 네가 스물아홉 이후에 겪은 일들과 겪지 않았어도 좋을 일들에 대해서는 지금 말해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냥 살아.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다만 한 가지 살긴 살되 그냥 살지 말고 따뜻한 물 좀 많이 마시면서 살아.


시인 박준

“29. 스물아홉. 세상의 셈법에서는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으나 한 존재에게는 영원처럼 긴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는 일의 지난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저는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나는 죽음은 모두 요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일 연장

이번 여름에도 나는 뭘 잘 못 먹고 있었다. 가끔 그랬다. 열아홉 이후부터 서른셋까지…. 일 년에 가끔이니까 십오 년 동안 서른 몇 번 정도…. 그 정도면 가끔이겠지. 매일매일은 아니니까. 여름이면 나는 내가 항상 너무 뚱뚱한가 생각했다. 민소매나 반바지를 입어도 우스꽝스럽지 않은지를 말이다.

신수영은 그런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봤다. 아직도 그러니?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신수영의 눈은 항상 내게 어떤 평가처럼 작용했고 그렇게 느껴질 때마다 신수영이 가진 것이 몹시 짜증나고 미웠다. 그런데 신수영이 가진 것은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신수영이 날 때부터 무척 마른 몸이라서,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만큼을 넘어서까지 와구와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라서 그렇게 구는 거라면 이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신수영은 살이 찌거나 말거나 신경을 안 쓰는 쪽이었고 나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쪽이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엔 아니면서 괜히 저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안달 내는 쪽에 서 있으니까 그쪽에서 아주 약간만 비켜서면 나를 비난하는 쪽, 나보다 무던하고 남의 눈을 나의 몸을 생각하지 않는 쪽에 설 수 있다. 나는 신수영이 그런 유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수영은 진짜인 것 같았다. 지난달에 배달음식을 너무 많이 시켜 먹어서 살쪘어, 그러면서도 심상해 보였다. 그렇게 말할 때 신수영은 진짜 살쪄 있었다. 너… 좀 쪘어? 라고 물어보면 픽 웃으면서 많이 쪘어, 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또 어느 때는 입맛이 없어서 보니 한 2킬로그램 빠졌더라, 라고 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달리 좋아하는 기색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것이 신수영이 가진 것이었다. 나에 대한 남에 대한 무관심. 나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관심이 없던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런 신수영에게 나는 매번 잔잔하게 열 받았다. 나는 가질 수 없는 걸 그냥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좀 짜증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그에게도 그랬다.

다른 것보다 가장 열 받는 건 여름만 되면 나를 눈치 보게 하는 그 신수영이 여름에 있는 내 생일을 매번 가장 열심히 챙기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신수영과의 관계는 내내 그랬다. 딱히 잘 맞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내 강박이나 콤플렉스를 고백해도 다정하게 마음을 헤아려주거나 말없이 오래오래 들어주는 상대도 아닌데 생일만 되면 나를 찾아왔다. 내가 먹지 않을 케이크를 들고 내가 먹지 않는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내가 가져온 케이크에서 빵 조각을 작게 떼어내거나 신수영이 사주는 저녁밥을 깨작거리고 있으면 예의 그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팍팍 좀 먹어라. 그런 다정하지도 않은 말을 하며.

그리고 다시 여름이었고 다시 내 생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생일이 대수냐고 여느 다른 날과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지만 축하한다는 연락도 몇 오지 않으면 어쩐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눈앞에 없으면 세상에 없는 사람인 걸까? 아무도 멀리서 날 생각하지 않나? 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생각이 꾸준히 끼어든다.

이번 생일 나의 일정은 다른 평일과 다름없이 일하는 학원에서 보내는 것뿐이고 다른 특별한 약속도 만남도 연락도 없다. 방학을 맞아 낮부터 고2 논술을 가르치고 저녁엔 다른 학년 보강까지 맡게 되어 저녁 열 시에 끝난다. 학원을 나서서 집에 도착하면 생일은 끝난다.

매사에 제발 기대도 바람도 없이 살고 싶은데 그런 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고 수업 중간 중간 나는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쉬는 시간, 복도를 오가며 강의실에 앉은 나를 들여다본 다른 선생님들이 식사 안 하세요? 라고 물었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것도 안 먹고 하루를 보내도 문제없었을 시간에 이상한 허기가 느껴졌다.

뭘 먹고 싶은가, 입맛은 없는데. 늦은 오후가 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을 먹는 시간도 지났지만 휴대폰은 조용하다. 다른 모두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수영도? 나는 이럴 때만 신수영을 생각한다. 절실하게.

마지막 수업 시간까지도 신수영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나는 서운하고 슬펐다.

허기진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학원 밖으로 나오는데 건물 앞에 신수영과 신수영의 차가 서 있었다. 뭐야? 놀라 묻는 내게 신수영은 까먹은 거 아니야, 라고 이상하게 대답했다. 뭔데, 라고 다시 물었지만 다른 설명은 없이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타.

뭐할 건데.

운전하지.

운전을 어디로 하냐고.

바다 갈 거야. 생일 연장.

오늘 일 늦게 끝나서 케이크 못 샀어. 없어도 괜찮지? 원래 안 먹지?

안 타? 신수영이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열린 창문으로 에어컨이 켜진 차 안을 채운 냉기가 흘러나와 여름밤 달궈진 내 팔뚝에 닿았다. 나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를 놀라게 한 신수영이 좋아 죽겠으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조수석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신수영이 일단 빨리 타, 하고 채근했다.

그제야 나는 우물쭈물 보조석으로 기어들어갔다. 우물쭈물 안전벨트를 매고 우물쭈물 고마워, 하고 웅얼거렸다. 뭐라고? 안 들려. 신수영이 내가 얄미워하는 그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흘겨보자 아 미안 미안, 너 생일이지, 하고 웃음기 머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태운 신수영의 차가 출발했다. 밤길을 달려 바다로 향하기 위해. 함께 달리는 다른 차들의 불빛이 촛불 같았다.


소설가 김화진

“<바자>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생일을 떠올리니 언제나 원하는 건 원할 때 오지 않고, 의외의 방향에서 의외의 순간에 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놀라움이 생일 선물 같다는 생각도요.”


일러스트레이터 최산호

“예기치 못한 축하의 자리. 때마침 가방에는 언제 넣어두었던 것인지 모를 폭죽이 있었습니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꺼내어 터뜨렸던 폭죽은 아주 작은 것이었어요. 축하를 받은 상대는 폭죽의 크기보다 훨씬 큰 기쁨을 느끼더군요. 이 책을 펼치는 독자 여러분이 건네는 어떤 모양의 축하든, <바자>의 29주년을 더욱 뜻깊게 만들어줄 겁니다. 함께 축하해주세요!”

Credit

  • 에디터/고영진
  • 디자인/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이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