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이진주의 그림에는 연속적인 데가 있다

분절된 저마다의 그림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을 닮았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5.08.31

불연속 서사의 그림 읽기


이진주(Lee Jinju)의 캔버스 위에는 내밀한 개인의 역사가 흩어져 있다. 대상은 섬세하고 정교하지만 도무지 사연을 알 수 없어 비현실적이다. 이면의 이야기를 밝힐 생각이 없는 작가는 유일한 단서로 모든 분절된 화면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연속연속»은 아라리오갤러리 전관 4개 층에서 4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에서 선보였던 <비좁은 구성>을 제외하면 신작이 대부분인데요. 어느 때보다 작품 설치에 대한 고민이 길었다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설치까지가 작업의 마무리입니다. 작업의 진짜 의미는 3차원 시공간 안에서 관객과 감응할 때 완성된다는 점에서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전시를 하기로 결정한 건 약 2년 전쯤이었을 거예요. 그때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전시장의 모습을 상상해왔습니다. 수시로 갤러리에 들러 조용히 머무르며 드로잉을 하기도 했고요. 특히 1층의 층고가 굉장히 높은데, 그곳의 넓고 높은 벽을 보면서 상상 속 이미지로만 있을 뿐 아직 실현되지 못한 작업들을 떠올렸죠. 어떤 크기와 형식으로 보여줄지, 어떤 동선을 유도할지 그려보면서요.

1층에 놓인 <슬픔과 돌>도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했나요? 여섯 겹의 막이 아코디언처럼 펼쳐진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 중 가장 큰 규모이기도 하죠.

맞습니다. 오래전부터 아주 큰 무대 위에다 ‘막’ 작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아라리오갤러리 1층의 높고 넓은 벽들을 보면서 막연한 상상을 구체화할 수 있었어요. 제 작업에서는 여백이 중요한데, 작품이 걸리는 벽은 일종의 여백으로서 작품과 함께 호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코디언 같다 표현하신 막과 막 사이 장면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이상하죠. 일상에서 마주쳤던 기이한 찰나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에너지들이 정지된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렇습니다.


<2시의 틈>, 2025, Handmade Leejeongbae black, handmade Leejeongbae white,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birch plywood, cherrywood, cross-grain plywood, Auro no.129 oil, 39x28x34(d)cm.

<2시의 틈>, 2025, Handmade Leejeongbae black, handmade Leejeongbae white,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birch plywood, cherrywood, cross-grain plywood, Auro no.129 oil, 39x28x34(d)cm.

공교롭게도 <슬픔과 돌>을 비롯한 신작에 돌이 많이 등장합니다. <낙하-시린>처럼 크리스털 같은 투명한 돌도 있고요. 10년 전 무렵의 작품에는 공사 현장에서 볼 법한 인공 구조물이 많이 등장했다면, 최근에는 그 자리를 돌이나 바위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저는 얼음이라 생각하고 그렸는데, 크리스털로 보셨군요. 투명한 돌, 광물,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제 작업에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묘사해 긴장감을 부여하는 그림이 많아요. 최근에는 그런 찰나의 시간과 대척점에 있는 대상으로 돌을 그리고 있어요. 해변의 고운 모래알이 실은 크고 단단한 바위였다는 사실이 믿어지나요? 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품고 있어요. 표면의 수많은 무늬와 균열을 그리고 있다 보면 단순히 돌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돌로부터 파생되는 풍성한 감각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블랙을 활용하는 방식이 훨씬 대범해졌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남편인 이정배 작가가 개발한 안료인 ‘이정배 블랙’으로 그린 블랙 페인팅이 사각이나 원형을 벗어난 비정형적 캔버스로 확장되었죠. 둥글게 말린 막 형태의 캔버스에 그린 <쫓아가는>처럼요.

<쫓아가는>은 최근 몇 년간 활발하게 선보였던 ‘막’ 시리즈와 블랙 페인팅을 혼합한, 처음 시도해본 형식이에요. 지금까지 블랙 페인팅을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사각이나 원형 캔버스에만 그렸던 건 이정배 블랙을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무척 어둡고 밀도가 높은 무광의 검은색이라 마른 뒤 가벼운 접촉에도 쉽게 오염되죠. 손자국도 잘 남고요. <쫓아가는>은 1층에 병풍처럼 서 있는 <겹쳐진-사라진>과 이어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이즈가 크고 비정형적이며 입체적인 캔버스 위에다 이정배 블랙을 쓰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습니다.


<슬픔과 돌>, 2025,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386x322cm.

<슬픔과 돌>, 2025,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386x322cm.

29점의 블랙 페인팅을 나열한 <대답들> 연작은 어딘가 의미심장합니다. 중간중간 띄어쓰기를 한 것처럼 비워둔 세 곳의 자리 때문인데요. 언제나 그렇듯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 없이 “보이지 않는 대답은 행간과 닿아 있다”는 말만 전했습니다.

네모 반듯한 44×34cm 크기의 그림 29점에 ‘대답들 01, 02, 03’ 같이 순차적으로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비어 있는 칸의 숫자는 건너뛰었고요. 결과적으로 <대답들 06> <대답들 16> <대답들 25>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유령처럼 어딘가에 있습니다. 분명히 피부로 느끼지만 아직 발화되지 않은 것들, 차마 언어를 붙일 수 없었던 것들을 상징해요. 글에서 행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명시된 텍스트보다 행간이 훨씬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대답들>은 32점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전시 관람의 마지막 동선인 4층까지 오르면 가장 먼저 가로 2m, 세로 3m 크기의 양면화 <오목한 눈물-볼록한 용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볼록한 용기>가 <오목한 눈물>의 일부인가 싶어 앞뒤로 자리를 옮겨 가며 한참을 번갈아 보게 되더군요. 두 작품은 어떤 서사로 연결되어 있나요?

제 작품에는 세상을 비극적이고 처연하게 보는 정조가 묻어나는 편인데요. 에너지가 모이고 고이는 오목한 골짜기는 그런 감각과 연결되어 있는 배경입니다. 먼저 작업했던 뒷면의 <오목한 눈물>은 생애 처음으로 올랐던 겨울 한라산의 장면에서 시작됐어요. 눈이 수북이 쌓여 있고,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동시에 푸른빛 이끼가 낀 돌들이 있는 축축한 겨울의 모습이요. 무척 기묘했던 풍경 안에다 서로 다른 세대의 모습, 생존에 대한 도상 같은 갖가지 분절된 이야기들을 심어두었어요. 그런데 한 발짝 떨어져 보면 선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죠. 이 풍경 안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힘, 용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볼록한 용기>입니다.

“분절된 이야기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설명은 앞서 언급한 <대답들> 연작과, 막으로 나뉜 그림들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전시 제목인 ‘불연속연속’도 떠오르고요.

사람은 단절과 연속이 끊임없이 맞물린 구조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파편적인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나라는 사람의 성격과 기질, 습관, 가치관을 형성하죠. 이 역설은 세대 간에도 적용됩니다. 내 어머니의 삶과 나의 삶, 내 딸의 삶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연속적인 데가 있어요. 제 회화 속 서사 또한 그렇습니다. 분절된 화면 안에는 단일한 서사로 압축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고, 이는 또 다른 분절된 화면으로 이어지며 뜻밖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신작 중 하나인 <무게의 뒷면>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원목 위에다 그린 앵글드 페인팅 형식도 같은 맥락에서 상징적이죠. 2차원 평면을 뒤틀어버림으로써 균열과 단절을 만든 겁니다.


<겹쳐진-사라진>, 2025,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56x37x200(h)cm.

<겹쳐진-사라진>, 2025,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56x37x200(h)cm.

그러한 특징 때문에 당신의 작품은 아주 정교하고 사실적임에도 불친절하게 느껴집니다. 작품의 의도와 배경 서사를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품 뒤에 숨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나요?

말씀하신 것처럼 각각의 대상은 매우 사실적이고 선명해서 대상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구성이, 대상과 대상과의 관계가 이상하죠. 논리적이지도, 쉽게 이어지지도 않아요. 이처럼 어색하고 엉뚱한 대상들의 관계 안에 저라는 개인의 역사를 마구 심어놓습니다. 이왕이면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숨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저 관람자들이 제 의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작은 디테일까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거죠. 이를테면 <무게의 뒷면>에 희미하게 적힌 숫자들이 제가 지금껏 수십 번 이사를 다니며 거쳤던 집들의 주소 마지막 숫자라는 사실까지 하나하나 밝히고 싶진 않다는 겁니다. 그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자 개개인의 감상을 듣고 싶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태연하고 뻔뻔하게 늘어놓는대도 좋아요. 그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것이 예술이 하는 일이니까요.

예술로부터 발화된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유일하게 당신의 작업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질문을 받고 한국, 서울에서 예술가로 활동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봤어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매 순간 내 결정에 의한 것보다 의도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던져져 있었을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솔직해지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곧 고유한 작업을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고요. 제 작업에는 지독한 내밀함이 있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여기에 거짓은 없다 자부해요. 이번 전시 역시 그렇게 차근차근 구축해온 세계를 보여줄 뿐입니다.

※ 이진주의 «불연속연속»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10월 9일까지 열린다.

Credit

  • 사진/ 이소정
  • 헤어&메이크업/ 김지혜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