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스 바자 코리아의 30년을 바라보다
다섯 명의 패션 에디터가 30가지 순간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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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30 MOMENTS
역사는 거창한 기록이 아니라 매일의 감각과 순간이 모여 완성되는 기록이다. <하퍼스 바자> 코리아의 30년도 그렇게 쓰여졌다. 무려 348권의 책 속에서, 다섯 명의 패션 에디터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골라낸 이 서른 개의 칼럼처럼 말이다.
1
1997년 11월호 ‘Go’
1990년대를 ‘점령했다’는 표현이 걸맞은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활약은 <하퍼스 바자>를 통해 더욱 빛을 발했다. 1997년 11월호에는 케이트의 화보가 두 개나 실렸는데, 하나는 로큰롤 시대를 주제로 사진가 테리 리처드슨이 촬영했고(‘All Shook Up’),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사진가 데이비드 심스의 ‘Go’ 화보다. 깨끗한 스튜디오 벽 앞에서 오로지 케이트 모스의 매력적인 마스크와 포즈에만 포커싱했는데 그래서일까? 동시대의 화려한 패션 화보보다 더 쿨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발렌티노,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 질 샌더, 헬무트 랭 등 1990년대를 풍미한 디자이너들의 의상(지금 입어도 손색없는!)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전설적인 패션 신이 탄생하게 되었다.
2
2017년 7월호 ‘Double Play’
지금으로부터 9년 전, 당시 글로벌 패션계에서 주목받던 라이징 모델 신현지와 배윤영이 함께한 <바자> 2017년 7월호 커버 화보. 사진가는 홍장현이다.
‘Double Play’라는 콘셉트 아래 저마다의 표정과 포즈로 룩을 완벽히 소화하며 닮은 듯 다른 매력을 드러냈다. 이제는 세계 무대를 누비는 톱 모델로 성장한 이들의 풋풋한 모습과 빛나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화보.
3
2021년 8월호 ‘팔도강산 프로젝트’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25주년을 맞아 패션팀에서 진행했던 ‘팔도강산’ 화보. 당시 어시스턴트였던 나는 지금의 편집장님과 함께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에 위치한 섬 수우도로 떠났다. ‘기암괴석 전시관’이라 불릴 만큼 장대한 암석과 절벽이 펼쳐진 그곳에서의 첫 촬영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곳곳의 숨은 절경을 찾아 긴 여정을 이어갔다. 대자연의 에너지와 패션의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진 장면으로 가득 채워졌다.
4
2016년 3월호 ‘Bowie, Forever Stardust’
2014년, 패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벨라 하디드는 순식간에 새로운 세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2016년, 모델스닷컴의 전문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모델’ 1위를 차지했으니 과언이 아니다. <바자>는 새로운 아이콘, 벨라 하디드를 누구보다 먼저 커버 걸로 선택했다. 영원불멸의 아이콘인 데이비드 보위를 오마주한 이 화보는 한 시대의 전설과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아냈다.
5
1997년 7월호 ‘String Seduction’
1997년에 이렇게 과감한 디렉팅이 가능했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화보. 전문도 다음과 같다. “끈에 포인트를 두어 노출을 강조한 아이템들이 많아지고 있다. 신발에서 벨트, 의상에 이르기까지 섹시함을 표현한 다양한 스트링 아이템 10가지”. 1세대 패션 사진가 최금화, 스타일 에디터 구정란, 모델 이상은으로 구성된 이 팀은 노출을 동반한 대담한 스타일링과 과감한 앵글로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6
2008년 3월호 ‘Eccentric Shadow’
과월호를 정리하다 모델 김다울의 화보 앞에서 손이 멈췄다. 학생이던 시절, 그녀를 휴대전화 배경화면으로 해둘 만큼 좋아했고 스타일을 따라 하기도 했다. 오래된 과월호 한 권은 그 시대의 패션뿐 아니라 내 꿈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 페이지를 덮는 일이 유난히 쉽지 않았다.
7
1999년 8월호 ‘The White Album’
난소암 투병 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미국판 <바자> 편집장 리즈 틸버리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계 최고의 포토그래퍼와 일러스트레이터 60명이 함께한 초대형 프로젝트다. 그녀가 사랑한 화이트 컬러를 주제로 했으며, 페이지 곳곳에 남겨진 패션계 인사들의 추모 글도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8
1999년 4월호 ‘White Out’
‘세련된 감각과 대담한 시선, 절제된 우아함’. <바자>를 정의하는 세 가지 언어다. 이 화보는 그 시선으로 화이트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복합적인 컬러를 담아냈다.
9
1997년 4월호 ‘KFPA’s Fashion Energy’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선보인 ‘패션사진전’에 참여한, 패션에 마지막 생명력을 불어넣는 젊은 그대들. 바로 사진가 김용호, 구본창, 권영호, 조남용, 조세현, 박경일, 안성진 등을 소개한 칼럼.
10
2009년 10월호 ‘Wild Things’
패션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화보일 것. 나오미 캠벨이 사파리에서 영감받은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사진가는 장 폴 구드. 표범과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원숭이와 줄넘기를 즐기고, 물을 내뿜는 코끼리 위에 올라탄 그녀의 모습이 압도적이다.
11
2015년 2월호 ‘멋의 미학’
‘K’ 한 글자만 붙어도 트렌드가 되는 지금. <바자>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국의 미학을 깊이 있게 조명해왔다. 디자이너부터 뷰티, 장인까지. 각 영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과의 만남을 아름다운 화보로 기록했다.
12
2019년 7월호 ‘Super’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바자>는 데뷔 20주년을 맞은 한혜진과 오래전부터 화보를 논의해왔고, 그녀는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으로 최상의 몸을 완성했다. 온몸을 검게 물들여 근육의 결과 보디라인을 강조한 파격적인 연출은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고, <바자>의 기획력이 돋보인 화보로 남았다.
13
2005년 11월호 ‘Back to the Future’
발렌시아가를 다시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그의 뮤즈 장만옥을 사진가 피터 린드버그가 포착했다. 로봇이 등장하는 미래적인 비주얼이 인상적.
14
2000년 1월호 ‘The It List’
새천년의 문턱에서 <바자>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 ‘잇걸(It Girl)’에 주목했다. 첫 페이지를 장식한 알렉산드라 폰 푸르스텐베르크 공주의 딸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케이트 모스는 여전히 패션계의 아이콘으로 활약하고 있다.
15
1999년 8월호 ‘Gothic Romanticism’
지금은 ‘선생님’ 호칭을 듣는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사진가 권영호가 선보인 시즌 화보. 마치 2026년 8월호라 해도 믿을 정도로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눈길을 끈다.
16
1998년 11월호 ‘Helmut Lang U.S.A.’
1999 봄/여름 컬렉션을 유럽보다 한 발 앞서 9월에 선보이며 항상 마지막으로 열리던 뉴욕 컬렉션의 관례를 깬 헬무트 랭. 뉴욕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그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면서 패션계의 오랜 전통이 깨지고 4대 컬렉션의 순서가 뉴욕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17
2013년 2월호 ‘Kat Daddy’
<바자>의 지난 30년에는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다채로운 면면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반려묘이자 패션계가 사랑한 고양이 슈페트와 함께한 ‘Kat Daddy’ 칼럼은 냉철한 거장의 이면을 담았다고 해야 할까? 슈페트를 소개하며 다정하고 유쾌한 면모를 보여준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18
2005년 12월호 ‘It’s All in the Stars’
스타 디자이너들의 영향력으로 패션 잡지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들의 화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 칼럼이 흥미로운 이유는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별자리를 주제로, 같은 별자리의 모델들과 함께했기 때문! 촬영 역시 처녀자리를 대표하는 칼 라거펠트가 도맡았다. 도나텔라 베르사체, 로베르토 카발리, 마이클 코어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의 신비로운(?) 비주얼을 만나볼 수 있다.
19
2019년 4월호 ‘Hello, I’m Pharrell’
지금의 성공 궤도에 오르기 전이지만, 당시에도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파리 오트 쿠튀르 기간에 진행한 퍼렐 윌리엄스 커버 화보는 칼 라거펠트와의 우정 그리고 신념이 담긴 캡슐 컬렉션 ‘샤넬-퍼렐’을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긴장되고 설레었던 촬영. 그러는 나와 정반대로 무척이나 여유롭고 느긋했던 퍼렐의 모습이 화보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20
2003년 1월호 ‘Mongolia’
<바자> 수석 패션 에디터로서 몽골 화보를 진행한 HLL중앙 강주연 대표에게 당시의 비하인드를 물었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얼어붙은 필름카메라 셔터를 녹여가며 촬영을 이어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특히 끝없는 설원 속에서 만난 다섯 살 소녀 뽀야와 모델 장윤주가 함께한 이 컷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는, 무언가 새하얀 순간으로 남아 있죠.”
21
2001년 7월호 ‘Wild Wild Westwood’
지금은 별이 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첫 한국 방문기를 에디터의 일기처럼 풀어냈다. 칼럼은 두 장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드라마 <명성황후> 촬영팀과 함께하거나, 경복궁 안 고려 이발소 앞에서 찍은 그녀의 모습이 풍경과 묘한 이질감을 이룬다. 이어 ‘저 할머니 누구예요?’, ‘아침부터 김치를 먹는’, ‘돼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여인’ 등 재치 있는 소제목과 함께 취재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날것 그대로 전한다.
22
1999년 7월호 ‘가방과 의자’
패션과 사물은 어디까지 닮아 있을까.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정물 사진가 프레데릭 리베라스(Frederik Lieberath)와 함께한 이 화보는 오브제와 패션 아이템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나란히 놓았다. 조명과 구도, 질감이 교차하는 순간 두 대상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익숙했던 형태는 새로운 맥락을 얻고, 낯선 조합은 익숙한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쓰임보다 형태를, 기능보다 아름다움을 먼저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오래전부터 <바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패션을 제안했다.
23
1999년 11월호
‘Beauty Has Gone Global and It’s About Time’
당시 19세에 불과했던 지젤 번천부터 에스토니아의 한 슈퍼마켓에서 눈에 띈 21세의 카르멘 카스 그리고 키 168cm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가진 17세 뉴요커 데본 아오키까지. “다양한 모델들이 인정을 받는 것이 패션계의 변화인 것 같아요. 미래를 향하는 지금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건 너무 멋진 일이죠.”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둔 모델계의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한 칼럼. 그리고 이 눈부신 피사체들을 <하퍼스 바자>의 전설적인 사진가 패트릭 드마르슐리에가 포착했다.
24
1998년 10월호 ‘A Few Good Men’
이정재, 정우성, 차승원, 김호진, 정찬 그리고 구본승. 당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비던 젊은 남자 배우들이 수트 화보를 위해 <바자> 카메라 앞에 모이다.
25
2017년 2월호 ‘Women in Novel’
동시대의 수많은 여성상을 다각도로 대변해온 <바자>. 소설 속의 여성을 패션 화보로 표현한 ‘Women in Novel’도 그중 하나다. 패션과 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이 화보는 여성의 욕망과 고독, 강인함을 담아냈다. 앞으로도 <바자>는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다채롭게 기록해나갈 것이다.
26
1997년 10월호 ‘The Suit that makes the Season’
좋은 화보는 시간을 견딘다. 1997년 <바자>가 담아낸 수트는 자유로운 여성의 태도였다. 모델의 말간 얼굴과 단정한 테일러링이 묘한 긴장을 만든다. 강인함과 여유, 절제된 아름다움이 공존한다고나 할까. 지금도 낡아 보이지 않는 사진이다. 화보를 고민할 때면 결국 꺼내 보는 페이지.
27
1999년 10월호 ‘패션쇼를 만드는 사람들’
패션쇼는 런웨이에 오르기 전부터 시작된다. <바자>는 세계적인 패션 프로덕션 디렉터 알렉산드르 브텍(Alexandre de Betak)을 만나 쇼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화려한 결과보다 창작의 과정을 먼저 들여다본 이 시선은 지금 다시 읽어도 신선하다.
28
2015년 3월호 ‘A Newer Look’
3년 차 디올 맨, 라프 시몬스의 인터뷰를 만날 수 있다. 2015년 크루즈 컬렉션을 입은 모델의 룩은 “박물관에 모셔두기보다는 실생활에서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9
1997년 5월호 ‘Shades & Shapes’
란제리 룩이 다시 런웨이를 채운 지금, 1997년 <바자>의 화보는 놀랄 만큼 현재적이다. 속옷을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로 풀어낸 시선. 1997년의 파격은 2026년의 현재가 됐다.
30
2002년 4월호 ‘Artistic License’
패션은 오래전부터 예술을 가장 가까운 영감으로 삼아왔다. 보티첼리의 고전적 아름다움부터 제프 쿤스의 키치한 세계까지, <바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을 패션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했다. 중요한 건 명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오마주는 복제가 아닌 또 하나의 창작이니까. 더 흥미로운 건 모두 당시 시즌 컬렉션으로 풀어냈다는 점. 랄프 로렌의 도트 패턴 스윔수트를 입은 모델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지방시의 발레 모티프 스커트를 입은 모델은 드가의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화보를 다시 펼쳐 볼수록 <바자>가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잡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Credit
- 에디터/ 서동범, 윤혜영, 윤혜연, 김경후
- 사진/ 김진훈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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