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쥐'부터 '손 없는 날'까지...K-장르물로 재탄생한 옛이야기
동심과 미신 뒤에 도사린 원초적 불안, 전래 서사를 비틀어낸 장르물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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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손님> 스틸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혹은 빛바랜 동화책에서 접했던 옛이야기에는 생각보다 섬뜩한 구석이 많았다. 사람의 손톱을 먹고 인간 행세를 하는 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원혼의 복수, 외딴 마을에 얽힌 잔혹한 저주, 특정한 날을 피해 움직여야 한다는 금기까지. 당시에는 순진한 권선징악이나 교훈, 혹은 일상적 풍습으로 넘겼던 이 서사들이 K-콘텐츠에서 매혹적인 장르물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이미 알고 있기에 방심하게 만들고, 그 익숙함의 껍질을 한 겹만 비틀어도 가장 기괴하고 낯선 공포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들쥐>
"내가 진짜다"... 손톱 먹은 쥐 설화가 빚어낸 현대적 공포
연출: 김홍선 / 출연: 류준열, 설경구, 이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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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들쥐> 스틸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 스틸
오는 8월 28일 전편이 공개되는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는 '쥐가 사람의 손톱을 먹으면 그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전래 설화에서 출발한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의문의 존재 '들쥐'에게 이름과 얼굴, 삶을 통째로 강탈당한 소설가 문재(류준열)가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형사 순용(이규형)과 얽히며 벌어지는 하드보일드 추격 스릴러다. <손 the guest>의 김홍선 감독은 괴이한 존재에 대한 옛 설화를 '내가 나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라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으로 번역해 낸다. 타인의 삶을 손쉽게 훔치고 도용하는 시대, 신분과 기억마저 빼앗긴 자의 처절한 사투는 고전 설화가 지닌 가장 심리적 공포를 정조준한다.
<장화, 홍련>(2003)
고전 원혼담을 가족의 트라우마로 치환한 심리 호러의 정점
감독: 김지운 / 출연: 임수정, 문근영, 염정아, 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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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화, 홍련> 스틸
영화 <장화, 홍련> 스틸
한국 고전의 장르적 재해석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다. 이 영화는 조선시대 계모 설화 '장화홍련전'의 뼈대를 과감히 전복했다. 억울한 자매의 원혼이 관아를 찾아가 한을 풀고 질서를 회복하던 원작의 권선징악적 구도를 지우고, 가족의 상실과 죄책감이 빚어낸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현대 정신의학적 미스터리로 변주했다. 귀신의 물리적 실체보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환영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 이 작품은 2003년 개봉 당시 약 314만 관객을 모으며 K-호러의 기준점이 되었고, 할리우드 리메이크(<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로 이어지며 오래된 원혼담이 현대적 심리 공포로 번역될 때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갖는지 증명했다.
<손님>(2015)
서구 명작 동화와 한국적 '한(恨)'이 만난 잔혹 스릴러
감독: 김광태 / 출연: 류승룡, 이성민, 천우희,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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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손님> 스틸
영화 <손님> 스틸
독일 민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의 외딴 산골 마을로 옮겨온 <손님>은 서양 동화와 한국 토착 샤머니즘의 결합을 보여준 흥미로운 실험작이다. 쥐 떼를 몰아내 주면 보상을 하겠다던 약속을 마을 사람들이 저버리면서 시작되는 파국은, 원작의 우화적 교훈을 넘어 한국적인 '한'과 집단적 죄의식으로 확장된다. 고립된 공동체의 집단 이기주의와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결합한 이 작품은, 비록 83만 관객에 머물며 흥행에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동화의 이면에 웅크린 잔혹한 원형(약속, 배신, 처벌, 복수)이 그 자체로 훌륭한 장르물의 문법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켰다.
<손 없는 날>
이삿날의 미신이 빚어낸 하룻밤의 오컬트
감독: 허정 / 출연: 변요한, 안재홍, 하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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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손 없는 날> 티저 포스터
영화 <손 없는 날> 대본리딩 현장컷
전래 설화가 아닌 일상 속 민속신앙으로 시선을 돌리면 신작 영화 <손 없는 날>이 기다린다. 날짜와 방위를 따라다니며 인간을 해치는 악귀(손)가 없어 이사나 혼례에 가장 길하다고 믿는 한국 전통 풍습을 역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날 새집으로 이사를 앞둔 우진(안재홍)과 아내 희연(하윤경)에게 기이한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만신의 제자인 무당 태주(변요한)를 마주하며 벌어지는 단 하루 동안의 사건을 그린다. <숨바꼭질>, <장산범>을 통해 일상적 공간의 균열을 집요하게 포착해 온 허정 감독은 '가장 안전한 날에 찾아오는 낯선 공포'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친숙한 생활 미신을 숨 막히는 오컬트 서스펜스로 탈바꿈시킨다. 최근 크랭크업을 마치고 후반 작업을 거쳐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영화 <손 없는 날> 스틸
넷플릭스 시리즈 <들쥐> 스틸
나열한 작품들을 관통하는 힘은 '원형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했는가'가 아닌 '익숙한 공포의 뼈대를 지금의 불안에 맞게 어떻게 비틀었는가'에 있다. 손톱을 먹고 나타난 가짜는 정체성 강탈의 불안이 되고, 원혼은 가족의 트라우마로, 피리 부는 사나이는 집단적 한(恨)으로, 길한 이삿날은 불길한 오컬트의 무대로 옷을 갈아입는다. 시대가 흘러도 인간이 두려워하는 근원적 불안, 즉 나를 잃어버리는 것,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 집단에 배신당하는 것, 설명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오래된 이야기가 오늘날 다시 스릴러의 언어로 되살아나 사람들의 심장을 조이는 작품으로 탄생한 이유다.
Credit
- 사진 / 넷플릭스·청어람·CJ엔터테인먼트·CGV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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