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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학이 헐리우드 영화가 되는 시대

한국문학의 출판과 편집을 담당하는 기획, 편집자들의 역할을 돌아볼 때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5.08.09

문학 앞에 K가 붙을 때


간명한 명제 하나. “한국문학은 전례 없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어질 문장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K-문학이라는 현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평론가와 편집자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이어 붙였다.



출판은 아날로그다

최근 국내 문학계에 큰 화제였던 소식. 출판사 허블에서 출간한 천선란 작가의 SF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이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와 영화화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문학, 그중에서도 장르문학이 글로벌 스크린 산업에 진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천 개의 파랑> 편집자로서, 이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음을 체감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계약이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워너 브라더스와 직접 소통을 담당한 미국 현지 에이전시 소속 직원 바바라 J. 지트워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국내 출판사와 해외 제작사가 대면할 수 있는 창구 없이 이메일로만 소통했다면? 협의는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이 쓰고 읽히는 것을 넘어 하나의 상품으로서 서로 다른 매체와 나라를 오가기 시작할 때,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그때부턴 얽혀 있는 사람 간의 대면 교류가 중요해진다. <천 개의 파랑>이 영화화되기에 앞서, 연극화 및 창작가무극화 계약을 체결하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부터 그 무게를 몸소 실감했다. 연극화 계약이 원활히 풀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천선란 작가 덕분이었다. 공연예술에 깊은 관심을 지닌 그는 연출가, 배우, 기획자들과 밀도 높게 소통하며 불필요한 절차를 줄여나갔다. 작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여준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완성도 높은 공연이 잇따라 탄생할 수 있었다. 책이 연극이 되고 할리우드의 영화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이토록 막힘없이 흘러간 경우는 흔치 않다. 자꾸만 지나온 과정을 곱씹게 된다. 연극화 과정에서 작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협업자들이 작가의 진가를 끝까지 모른 채로 일을 진행했다면? 영화화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은 이 산업의 본질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출판은 여전히 아날로그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책의 물성과 현장의 독서 분위기를 제대로 체감하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며, 무엇보다 작가의 진가를 이해하려면 직접 만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메일 몇 통을 주고받는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만나 정기적으로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퀄리티와 속도 면에서 훨씬 단단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문학은 텍스트의 산물이지만, 이를 소개하고 알리는 과정에는 텍스트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편혜영의 <홀>, 정유정의 <종의 기원>, 돌기민의 <보행 연습> 등 <천 개의 파랑> 외에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외 영상화 흐름에 진입하고 있는 작품은 많다. 정보라의 <저주토끼>, 손원평의 <아몬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같은 작품들도 다양한 문화권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지금 한국문학은 단발적인 성공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다층적인 성장을 이루는 전환점에 와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을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어가려면 더 촘촘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 전략이라는 것에 출판 편집자로서 몇 가지 구체적인 상상을 더해봤다. 핵심은, 교류의 중심을 작가에만 두지 않고 출판사, 더 넓게는 편집자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출판은 결국 기획의 문제이며, 기획은 작품이나 작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 작품을 조명할지, 어떤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할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편집자의 역할이 크다. 따라서 기획 초기 단계부터 출판사와 편집자가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업계 전반의 교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내에 머물러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도 해외 출판사와의 협업을 통해 실현 가능성이 생긴다. 예컨대 한국과 해외 출판사가 공동으로 작가를 소개하는 구조만으로도 독자에게는 충분히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구조가 확장된다면, 지금처럼 소수의 유명 작가에게 집중된 해외 진출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실력 있는 신인 작가들이 해외 시장에 소개되는 일도 많아질 것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작가가 먼저 해외에서 반응을 얻고, 그 성과가 다시 국내로 이어지는 흐름도 충분히 가능하다. 해외 진출이 국내 출판 생태계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그 흐름을 이어받아 또 다른 해외 진출의 기회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도 기대할 수 있다.


변화는 기술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최근 언어 기반 AI의 빠른 발전은 번역 출판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출판 가능한 수준의 고퀄리티 번역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지만, 출판 여부를 판단할 정도의 번역은 이미 AI가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다. 기술은 세상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국문학이 언제든 세계문학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기획·디자인·마케팅 전반에 걸친 판을 새롭게 짤 필요가 있다.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판권을 수출하는 일이 아니라, 문학이 번역되고 해석되며 새로운 맥락 속에서 수용되는 전 과정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편집자는 그 설계의 실무자이자 전체 흐름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편집자의 역할은 작가의 글을 책이라는 상품으로 만드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공유할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야말로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지금 K-문학이 타고 있는 흐름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 가능한 구조로 이어가기 위해, 기획자와 편집자들은 질문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가 사랑받는가? 지금 우리가 세계에 건넬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어떤 이야기를, 누구와 나눠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가? 우리가 답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 한국문학은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Credit

  • 사진/ 김래영
  • 글/ 김학제(출판사 허블 편집자)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이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