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서재에서, 소설가 김화진이 써내려간 문장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문을 연 작가 박완서 아카이브 공간에서, 소설가 김화진이 고른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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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문장들
일기 한 줄, 원고 한 장. 작은 서재에서 써내려 간 문장들은 퇴색되지 않은 채 빛을 발한다. 세 명의 소설가가 작가의 책장에서 발견한 문장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된 작가 박완서의 생애 마지막 일기. 15년 전인 2011년 1월 20일 타계하기 사흘 전 쓴 일기에 글쓰기와 삶을 향한 사랑과 특유의 유머가 드러난다. “일기도 메모 수준이지만 쓰기로 했다. 워밍업이다. 살아나서 고맙다. 그동안 병고로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죽었으면 못 볼 좋은 일은 얼마나 많았나. 매사에 감사. 점심은 생선초밥으로 혼자 맛있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엎드려서 글을 쓰다가 밥상을 놓고 글을 쓰니, 이렇게 좋은 것을, 하고 좋아하던 게 엊그저께 같은데 이젠 버젓하게 큰 책상에다 의자에 앉아서 쓴다.” 작가 박완서는 마흔에 등단한 이후 15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책상을 갖게 됐다. 작가의 작고 15주기를 맞은 올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새롭게 마련된 박완서 아카이브는 작가의 서재를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평생 써온 나무 책상은 물론, 작고하기 전까지 머무른 구리 아치울 서재 책장의 배열까지 그대로 옮겨왔다. 유족은 작가의 소장 책과 친필 원고, 생활 물품 6천여 점을 기증했고, 서울대학교 도서관 측에서 수 년 동안 분류하고 보존하는 과정을 거쳤다. “책장을 살펴보면 사전과 시집을 자주 보시기에 책장 앞쪽에 둔 것들이 많죠. 원래 책이 훨씬 더 많았는데 워낙 정리를 좋아하셔서 중간중간 정리하셨다고 해요. 얼리어댑터였기 때문에 일찍이 컴퓨터로 작업을 하셨어요. 그래서 원고의 유필 자료가 거의 안 남았는데, 편지와 일기 같은 것을 보관하고 있죠.” 서울대학교 도서관 김수진 연구관이 말했다. 작가와 지인들이 기증한 책은 신청 후 그 자리에서 열람할 수도 있다. 박완서 작가가 읽던 책에는 맨 앞장에 장서 도장이 찍혀 있다.
서재 공간 옆 전시실에서는 아카이브 조성 기념전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작가가 노년에 쓴 동화에서 따온 것. 입구 벽면에 쓰인 연보를 읽는다.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겪고 학업을 중단했다가, 1970년 불혹의 나이에 <나목>으로 등단한 사실이 쓰여 있다. 대표작의 면면을 살펴보면,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같은 우리가 익히 알던 한국 근현대문학사를 통과해온 작가의 소설도 보이지만, <마지막 임금님> 같은 동화책이 눈에 띈다. “여러 세대가 호흡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의 자녀는 물론 손자와도 무척 소통을 잘하셨기 때문이에요. 한국전쟁 시기를 겪은 그 세대의 마음만 아는 게 아니라 다른 세대의 마음도 파악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여성의 독립에 대한 글을 쓰며 페미니즘 문학의 포문을 연 3부작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서 있는 여자>(1985),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죠.” 전쟁과 여성, 대중 등 전시장은 주제에 따라 일곱 개의 챕터로 나뉜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미망>을 1996년 드라마화한 영상이 전시장 한편에 상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봉틀과 사진기, 손때 묻은 해산 사발, 그리고 동대문에서 원단을 떼어 딸에게 만들어준 원피스 등 소박한 생활의 흔적과 밀접한 사물도 볼 수 있다. 원고 뒷장을 이면지로 활용해 자녀들에게 쓴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케익은 똑같이 다섯 개 잘라 놓았으니 싸우지 말고 먹고 원균이는 공부할 때 좀 더 주어도 된다. (중략) 케익 작은 것은 할머니 몫이니 너희들만 먹지 말고 드려라.” 둘째 딸에게 당부하는 메모에 시선이 머물렀다.
전시의 맨 마지막 공간에는 일기장들이 놓여 있다. “선생님은 대표적인 악필이세요. 주부는 악필일 수밖에 없죠. 아이를 보다가 글을 쓰고 밥상에서도 글을 쓰니까요. 소장한 자료들 중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일기는 특별해요. 선생님께서는 자전적 경험을 녹인 소설을 쓰셨거든요. 소설이라는 건 늘 허구가 들어가니까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상상인지 모르는 법인데, 일기는 작가의 삶이 소설이 되는 걸 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죠.” 단지 몇 권의 소설과 산문을 읽은 내게 박완서는 ‘불가해’한 창작을 이어간 작가로 남아 있었다. 고백하자면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쉽게 그 말을 내뱉기엔 어려운 작가. 40여 년 동안 장편소설 15편, 단편소설 97편, 그리고 산문 660여 편을 쓴 열성적인 창작자. 작품 속에서 전쟁이나 산업화 시대처럼 시간차가 있는 인물을 그림에도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문장을 보면 섬찟하다가 이내 천연덕스러운 농담에 웃게 만들고, 수많은 경험을 담아낸 에세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쩐지 삶의 모든 이치를 다 아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이해하는 두께에 비해 작가의 시선은 너무도 예리하고 두터워 괴리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기를 한 장씩 읽으며 나를 놀랍게 하는 것은 글쓰기와 삶을 향한 사랑이다. 매일의 다행과 감사를 빌며, 어떤 어려움에도 결코 명랑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밤에 꽃보다 아름다워 보면서 울었다.”(2004. 4. 7.), “오늘 하루는 글쓰기에 거의 완벽했다.”(2008. 6. 17.) 우리를 놀랍게 만드는 작가의 삶과 글쓰기는 이토록 나란한 선 위를 걷는다.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내 박완서 아카이브 조성 기념전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은 4월 30일까지 열린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선생이 지난 1월 발간된 박완서 작가의 단편집 <쥬디 할머니>를 위해 제공한 사진. 작가의 50대 중반 무렵 모습이다.
글을 쓰며 수시로 집어 들던 각종 사전과 다양한 시집이 꽂혀 있다.
사람의 배 속이랑 가슴 속이랑 다 열어봤겠네.” “마음도 봤어?
언젠가부터 한 해의 시작 즈음 박완서의 책을 다시 읽는 일을 나만의 신년 행사처럼 하고 있다. 이런 마음을 먹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그런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든든한 마음이 든다. 일 년을 잘 살아봐야지, 씩씩하고 재밌게, 잘 쓰고 많이 읽으면서. 그런 결심을 하면 이 결심을 꺼트리지 않고 바람을 불어 더 세게 일게 해줄 소설을 찾아다니게 되고, 그러다 보면 또다시 박완서의 소설들 앞에 서 있다. 읽은 것을 다시 읽을 때도 있고, ‘이번 기회에’ 하며 읽지 않았던 것을 집어들 때도 있다. 아직 읽지 않은 게 있다니, 그런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인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반가움이다. 잘 됐다, 아직 안 읽은 게 있었어, 하는 반가움을 품고 집어든 올해의 책은 <오만과 몽상>(세계사, 2012, 전2권)이었다.
이 소설은 한때 절친했던 두 친구, 현과 남상의 이야기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남상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현. 두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서로에게 빌리며 우정을 나눈다. 현은 남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자 ‘의사 남상이’라는 제목을 품고 살며, 남상은 자신보다 부유한 현에게 참고서를 빌려 의대에 가려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나 어느 날의 날벼락처럼 현은 남상으로부터 절교를 받아들게 되고, 절교의 이유는 현으로서 상상하지 못했던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화해하지 못할 이력이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남상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현, 두 인물에 대한 소개는 이렇게도 가능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빈촌 셋집의 남상과 친일파의 후손인 부잣집 아들 현.
남상이 절교와 함께 일러준 계보는 현에게 쫓아버릴 수 없는 족쇄이자 보이지 않는 시선이 된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악덕 기업인은 현이를 낳고….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1권, 103쪽)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것이다. 그날 이후 현은 집안의 패물을 훔쳐 가출한다. 패물을 끝으로 더는 이 집의 돈을 쓰지 않고 도움을 받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하며 셋방을 구하고 재수 끝에 의대에 입학한다. 남상의 꿈이었던 의사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누리던 부와 꾸었던 꿈을 모두 뒤로한 채 남상처럼 사는 것이, 남상에게 보이기에 적절한지 아닌지가 현에게는 가장 중요해진다.
<오만과 몽상>은 내가 해마다 읽기를 결심한 박완서의 소설 중 <휘청거리는 오후>(전2권), <미망>(전3권) 이후 오랜만에 도전한 두 권으로 이루어진 긴 장편소설이다. 두꺼운 책을 읽을 때면 늘 그러는 것처럼 첫 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약간의 긴장과 압박감으로 몸이 뻣뻣한 채이지만, 첫 장이 넘어가고 박완서의 문장에 올라타면 바다 속 해파리가 된 것처럼 굳었던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낀다. 아무것도 거치는 것 없이 그저 따라가면 된다는 이완과 안도감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박완서가 펼쳐 보여주는 한 시대의 가장 펄떡거리고 수선스러운 장면부터, 한 사람의 가장 그악스럽고 수치스러운 내면까지 목도하게 된다. 그걸 재밌어 하며 읽고 나면 깨닫는다. 해파리인 양 하던 내가 사실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나를 해파리로 착각하게 하는, 그래서 너울너울 바다 속에 편안히 있으면 될 거라고 믿게 하는 박완서의 문장은 순식간에 돌변하여 내가 마신 물이 짜디짠 물이고 내 몸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편안하지만 돌변하는 문장. 읽을 땐 재미있지만 네가 지금 뭘 읽고 있는 줄 알아? 뭘 보고 있는 줄 알아? 하고 마음속 어딘가를 쿡쿡 찌르는 그 문장들이 지시하는 것은 확실히 짠맛과 무게다. 짠맛+무게. 나는 그것을 다시 인간, 이라고 불러본다. 짠맛+무게=인간. 박완서의 문장은 나를 인간으로 돌아오게 한다. 작가가 인간에 대해 쓰고 있음을 알게 하고, 인간에 대해 어디까지 궁금해했는지 보게 한다. <오만과 몽상> 속 인물인 영자의 말을 작가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의 배 속이랑 가슴 속이랑 다 열어봤겠네.”(40쪽) “마음도 봤어?”(42쪽)
작가는 뭐라고 대답할까. 조금은 봤어, 라고 말할까? 분명히 본 것 같은데, 그 부분을 소설에서 고르자면 어느 부분이 될까? 이런 고민이 당연한 것이, 박완서가 우리에게 쥐어주는 문장은 너무 많다. 소설 한 편을 읽으면 꼭 한 문장씩은 고르게 되므로 쉬지 않고 써낸 작가의 작업량을 생각했을 때 아득할 정도로 많다. 그리고 박완서 읽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중 유독 작가가 자주 쓰는, 친숙해하는 문장을 고르는 일도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도 <오만과 몽상> 속 그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인물이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 아니라 언뜻 스쳐지나가는 부분에 있었다. 그것은 ‘재미 보다’ ‘연애 걸다’ 같은 표현이었다. 줄거리에서도 멀고, 주요하거나 의미 있는 문장은 아닐지 몰라도 누구보다 신랄한 박완서의 인물을, 그런 인물을 쓰는 작가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표현들.
<오만과 몽상>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박완서의 다른 소설들을 읽던 지난해, 지지난해에도 했던 생각인 것 같지만 한 번 더. 사람들이 앙심 품고 후회하고 연애 걸고 재미 보는 소설 쓰고 싶다. 박완서처럼 진실이라 얄밉고 정확해서 밉살맞은 문장으로. 저속한 욕망을 지니고 야속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 이야기 쓰고 싶다. 박완서처럼 그들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보이는 문장으로.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도 읽고야 마는 그런 거 쓰고 싶다. 읽는 이를 해파리로 만들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문장으로. 그리고 이 생각들을 소망이나 꿈, 같은 단어로 말하기보다 오만이나 몽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시 몰라? 언젠가 쓸 수 있을지도, 라는 오만과 잘 쓰면 얼마나 좋겠어, 하는 몽상. 가끔 오만해져서 즐겁고 가끔 몽상 속에서 달콤하다. 박완서 덕분에 나는 두 단어를 마음껏 가진다. 글/ 김화진
<오만과 몽상>
부유한 친일파 가문의 막내 아들 ‘현’, 가난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장손 ‘남상’. 대척점에 있는 두 남자의 인생을 그렸다. 각각 소설가와 의사를 꿈꾸는 두 사람에게 부조리한 현실의 문제가 덮치며 한 시절의 꿈은 헛된 몽상이 되고, 인물들은 서서히 파멸한다. 1979년부터 2년여간 <한국문학>에 연재됐다.
Credit
- 에디터/ 고영진
- 사진/ 표기식(공간), 호원숙(인물)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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