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방콕으로 가다

방콕 쿤스트할레에서 전시가 열릴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 몇 가지.

프로필 by 손안나 2026.08.27

BANGKOK+ART


그레이엄 그린은 방콕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이렇게 적었다. “거의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거의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곳”. 오늘의 방콕은 그 문장에 어울린다. 이제는 그 ‘무엇이든’에 현대미술도 포함된다.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과 협업한 방콕 쿤스트할레에서 출발해 방콕에서 예술을 즐기는 몇 가지 방법을 전한다.


방콕에서 강릉을 만난 일에 관하여

방콕 차이나타운, 야오와랏에 자리한 방콕 쿤스트할레의 전신은 1970년대부터 교과서를 만들던 인쇄 공장이었다. 2001년 불의의 화재를 겪은 이곳은 그 후로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2024년 미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건물에 들어서면 검게 그을린 외벽과 낡은 콘크리트, 곳곳에 남아 있는 화재의 흔적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상처를 지운 공간에 예술을 들여놓은 게 아니라,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에 예술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듯하다.

이곳에서 열린 «경계에서 함께 보기(Watching Together at the Boundary)»는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에서 제작·발표한 커미션 작품을 쿤스트할레의 공간에 맞춰 새롭게 구성한 전시다. 강릉이 방콕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니다. 물이 삶을 결정하는 지역의 사람들과 산이 삶을 결정하던 지역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회복을 기원하며 자신들만의 의례를 치렀다. 그게 바로 송크란과 단오제다.

정연두, <Syncopation #5> 스틸컷, 2025, 3채널 4K 디지털 비디오와 단채널 항아리 조명 설치, 컬러, 사운드, 혼합 매체, 가변 크기. 본 상영을 위해 단채널 비디오 버전으로 수정, 17분 21초.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25) 커미션. © (재)파마리서치문화재단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박소희는 기자간담회에서 “환대가 주제가 아니라 형식으로 존재하도록 했다”고 말했는데 그의 의도는 일찍이 개막식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국가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의 무격부 전승자들로 구성된 전문 예술 단체, 전통연희집단 푸너리가 화재의 흔적이 남은 방콕의 옛 인쇄 공장에서 강릉단오굿을 선보이는 장면이 어디 흔한가. 푸너리는 마치 건물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쿤스트할레 안을 이동하며 신명 나는 연주를 선보였고 관객들은 강릉단오제의 상징적 제의물인 ‘지화(紙花)’를 손에 들고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 장면은 ‘함께 보기’라는 전시 제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 함께 본다는 건 같은 작품을 동시에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소에서 시간의 층위를 느끼며 머무는 것일 테니까. 서로 다른 도시의 이미지와 소리와 의례와 이야기가 만난 이곳 쿤스트할레 방콕에서 나 역시 탑돌이하듯 오래 맴돌았다. 동행한 다른 기자에게 물었다. “이쯤이면 이 건물의 상처도 조금은 치유됐겠죠?” “그럴 것 같아요, 신명 나는 꽹과리 소리에 귀신들도 놀라 도망갔을 걸요.(웃음)”

개막식이 끝나고 고등어, 이양희, 정연두, 홍이현숙,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다섯 명의 작가가 만든 다섯 편의 무빙 이미지 작품이 상영됐다. 지난 몇 년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본 작품들이지만 만약 예술이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과 인간,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험의 과정이라면 나는 이 작품들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고등어, <사각의 검정> 스틸컷, 2023, 단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분 56초.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25) 커미션. © (재)파마리서치문화재단


먼저 고등어의 <사각의 검정>은 차이나타운이라는 ‘경계’에 위치한 이 공간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상기시켰다. 방콕이 그렇듯 강릉 역시 관광 도시이면서 동시에 다문화 노동 도시다. 대부분의 외지인이 강릉을 커피와 바다라는 낭만적 키워드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베트남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가 이 도시의 농업과 어업, 관광산업을 지탱한다. 이 작품은 강릉에서 일해온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노아의 방주와 한국의 성황 설화 등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겹쳐낸다.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 출신 이주민의 삶과 이슬람 신앙을 가진 이들이 기도할 공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이 이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그들의 노동이 강릉이라는 도시의 표면을 이루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도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온전히 갖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한 실존적 작품이다.

아라야 라스잠리안숙, <개들의 궁전> 스틸컷, 202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5분. © (재)파마리서치문화재단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정연두의 <싱코페이션 #5>이었다. 지난해 강릉 옥천동 웨어하우스에서 선보인 3채널 영상이 단채널로 바뀌어 상영되었다. 삼각형 구도로 놓인 세 개의 화면에는 강릉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는 대관령 산신제, 시민들이 쌀을 모아 빚은 신주를 산 정상까지 옮기는 의례, 그리고 매년 강릉을 위협하는 산불의 풍경이 교차한다. 여기에 1915년 독일의 에디슨 축음기에 녹음된 고려인들의 육성에서 채집한 선율을 바탕으로 새롭게 작곡한 음악이 더해진다. 두 대의 피아노가 마주 보고 연주하지만, 한 대는 현을 모두 제거한 피아노다. 건반을 눌러도 망치가 부딪히는 소리만 날 뿐 멜로디는 들리지 않는다. 관객은 완전한 음악이 아니라 일부만 들으며 들리지 않는 나머지를 스스로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놀랍게도, 작가는 이를 신주가 발효되는 과정과 연결한다. 시민들이 조금씩 가져온 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작용을 거쳐 술이 되고, 그 술은 다시 산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된다.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지만, 마지막에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시간과 힘이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보이는 것을 믿지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썩어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각박하지만 기묘하게도 이것이 술이 되어 누군가를 위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아티스트 토크에서 정연두가 덧붙인 말이다. 같은 시각 건물 위층에서 열린 또 다른 전시 «Spirits Melt to Flesh»에서 포착한 셀주크 제국의 철학자 알가잘리의 사유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자”가 뇌리를 스쳤다. 화면 속에는 산불이 지나간 강릉의 풍경이 있고, 나는 화재 뒤에 검게 그을린 쿤스트할레 한가운데 서 있다. 타버리고 남은 것은 무엇인가. 산불이 지나간 자리엔 다시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문을 닫은 인쇄 공장은 이제 사람과 예술을 받아들이는 장소가 됐다. 무언가를 잃고 난 뒤 우리는 어떻게 삶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 회복의 몸짓을 경계에서 함께 보고 왔다.

Bangkok Kunstalle 599 Pantachit Alley, Pom Prap, Pom Prap Sattru Phai, Bangkok 10100

Wed–Sun 14:00–20:00




관련기사


Credit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MOST LIK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