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그랑 팔레가 새장으로 변신한 이유. 샤넬의 2027 S/S

커다란 달이 떠있고 칼새와 제비가 날아다니는 쇼장 풍경. 그 사이를 워킹하는 샤넬 우먼들.

프로필 by 윤혜영 2026.10.26

OUT OF THE CAGE


새장 안에서 시작된 자유로운 상상. 마티유 블라지는 샤넬의 오랜 유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설고 매혹적인 것으로 만든다.


거대한 새장으로 변신한 그랑 팔레. 커다란 달이 떠 있고, 칼새와 제비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거대한 새장으로 변신한 그랑 팔레. 커다란 달이 떠 있고, 칼새와 제비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랑 팔레가 거대한 새장으로 변신했다. 연두색 철골과 유리로 이루어진 지붕 아래 커다란 달이 떠 있고, 그 곁에는 빛을 뿜어내는 새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패션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범을 지닌 하우스, 샤넬의 2027 S/S 컬렉션이 열리는 쇼장 풍경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대대적인 이동으로 패션계의 지형이 뒤바뀐 지난 1년. 누군가는 찬사를, 누군가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 가운데 샤넬 아티스틱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한 인물이다. 하우스의 오랜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그 안에 갇히지 않는 태도. 자유를 향해 날개짓하는 칼새와 제비는 지금 블라지가 이끄는 샤넬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오프닝과 피날레를 장식한 모델 디아니라 휘르뷔스허.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2.55 백은 가브리엘 샤넬이 직접 디자인한 유일한 백이다.

오프닝과 피날레를 장식한 모델 디아니라 휘르뷔스허.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2.55 백은 가브리엘 샤넬이 직접 디자인한 유일한 백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와 여전히 함께한다. 나는 그 아이의 꿈을 이루고 취향을 만족시켰다. 까다로운 안목 역시 그 아이에게서 물려받았다. 그 아이는 내가 기쁘게 해줄 수 있었던 사람이자,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다.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며, 나 역시 지금의 내가 이룬 모든 것에 대해 그녀에게 빚을 지고 있다.” ‐ 가브리엘 샤넬


“여성은 평생 여러 모습의 자신이 되어 살아간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절묘한 시체 게임’처럼 하나의 정체성이 또 다른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한 여성 안에 존재하는 여러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서는 가브리엘이라는 한 여성이 샤넬이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 마티유 블라지


샤넬의 쿠튀르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디테일들.

샤넬의 쿠튀르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디테일들.

시간을 뛰어넘어 가브리엘 샤넬과 마티유 블라지가 대화를 나눈다. 그 상상 속 대화에서 샤넬의 2027 S/S 컬렉션, ‘대화-세 번째 장: 동전의 양면’이 시작된다. 블라지는 어린 가브리엘이 우리가 아는 샤넬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저 한 인물의 일대기를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브리엘의 삶을 통해 한 여성 안에 공존하는 여러 자아,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가브리엘을 둘러싼 에드워드 시대의 엄격한 코르셋과 테일러링부터 여성의 몸을 해방한 혁신적인 샤넬 수트까지. 블라지는 그녀가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또 새롭게 만들어낸 옷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봤다. 코르셋의 뼈대를 연상시키는 희미한 라인, 화려한 페플럼 장식, 러플 칼라와 바디스 곡선이 그 흔적이다. 쇼 노트에서 “지나간 패션의 삶이 남긴 유령 같은 흔적”이라 표현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진 않았다. 오래된 실루엣과 디테일은 새로운 구조와 비례, 질감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테일러링에서는 이러한 변주가 더욱 선명했다. 격식 있는 남성용 데이웨어와 이브닝 웨어는 재단 면을 가공하지 않은 로 에지 질레(조끼)로 변형돼 트라우저와 짝을 이루거나 펜슬스커트 수트로 재해석됐다. 반면 1930년대 스타일의 드레스는 시퀸과 바이어스 재단, 니트와 비즈 장식을 통해 티셔츠처럼 가볍게 몸을 감쌌다. 남성성과 여성성, 엄격함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역설. 블라지는 샤넬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해방의 정신을 오늘날의 옷으로 풀어냈다. 격식은 유지하되, 몸은 한결 자유로워졌다. 이제 우아함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블라지의 옷은 그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소재의 변주도 흥미로웠다. 서로 다른 두께와 투명도의 프린트 실크를 겹겹히 쌓은 플루(flou) 드레스는 구름처럼 가볍게 흘렀다. 아침의 은은한 빛부터 황금빛 노을, 깊은 밤까지. 겹쳐진 실크와 풍성하게 흐르는 실루엣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습과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다. 마치 하늘의 한 조각을 옷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과감한 컬러와 그래픽적인 패턴, 입체적으로 부풀어 오른 칼라와 풍성한 텍스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소매 끝 디테일은 마치 새의 둥지를 떠올리게 한다.

과감한 컬러와 그래픽적인 패턴, 입체적으로 부풀어 오른 칼라와 풍성한 텍스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소매 끝 디테일은 마치 새의 둥지를 떠올리게 한다.

쇼장을 가득 채운 새들은 옷 위에서도 날개짓을 이어갔다. 단추와 주얼리, 자수 장식에 등장한 새 모티프부터 깃털이 빠지고 새로 돋아나는 듯한 디테일. 그러나 자유를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은 옷 그 자체였다. 공기처럼 가볍고, 몸의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실루엣이 바로 그것. 이러한 소재의 실험은 쿠튀르와 레디투웨어 사이의 거리마저 좁힌다. 아틀리에의 기술과 창의성이 일상의 옷장으로 이어지는 것. 오트 쿠튀르를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고객에게도 그 가치를 전달한다. 사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옷과 실제로 입고 싶은 옷은 별개의 문제다. 블라지는 그 둘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쿠튀르의 정교함을 갖췄지만 거추장스럽지 않고, 현실에서 입을 수 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옷. 블라지는 기술적 혁신을 단순한 볼거리가 아닌, 소유하고 싶은 옷으로 완성할 줄 안다.

피날레에는 오프닝을 장식했던 디아니라 휘르뷔스허(Dyanira Hurbuscher)가 다시 등장했다. 제2의 피부처럼 몸을 감싸는 언더웨어에서 출발한 쇼는 샤넬의 상징인 트위드 수트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던 트위드는 아니었다. 이번 시즌 새롭게 개발한 ‘스모크드 트위드(smocked tweed)’는 놀라울 만큼 가볍고 유연하며, 기능성 의류에 가까운 활동성을 갖췄다. 샤넬에서 트위드를 없애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트위드를 새롭게 만드는 것 아닐까. 블라지는 화려한 장식이나 극적인 실루엣 대신, 옷이 몸 위에서 움직이는 방식 자체를 바꿨다. 디아니라의 손에는 가브리엘 샤넬이 실제 소유했던 아카이브 속 2.55 백이 들려 있었다. 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이 백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다른 액세서리에는 블라지 특유의 유머 감각이 스며들었다. 구름을 그대로 떼어낸 듯한 백, 새들이 탈출해버린 새장 미노디에르, 시계 체인을 닮은 잠금장치까지. 블라지는 샤넬의 아카이브를 엄숙하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마음껏 놀 줄 안다. 익숙한 상징들이 위트 넘치는 오브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샤넬 우먼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혹적이다. 익숙한 샤넬의 코드에 더해진 낯선 디테일, 섬세한 장인정신과 자유로운 상상력. 그 진가는 런웨이보다 가까운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샤넬 우먼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더욱 매혹적이다. 익숙한 샤넬의 코드에 더해진 낯선 디테일, 섬세한 장인정신과 자유로운 상상력. 그 진가는 런웨이보다 가까운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결국 이번 컬렉션이 이야기하는 것은 옷을 넘어, 그 옷을 입는 여성이다. 어린 가브리엘부터 우리가 기억하는 샤넬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의 삶에는 수많은 모습이 겹겹이 쌓여 있다. 블라지는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지우지 않는다.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샤넬이 말한 자유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나의 모습에 갇히지 않고, 언제든 또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 블라지는 이제 새로운 샤넬을 선언할 필요가 없다. 트위드는 여전히 트위드이고, 수트는 여전히 수트지만, 그것을 입고 움직이는 여성의 모습은 달라졌다. 그는 샤넬의 유산을 바꾸는 대신, 우리가 샤넬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Credit

  • 사진/ © Chanel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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