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스트립 덕후가 만든 다큐멘터리, '메릴스트립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영화 '메릴스트립 프로젝트'를 연출한 박효선 감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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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ERYL,
메릴 스트립을 만나겠다는 포부가 10년의 기록이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로 감독 박효선은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도 뜨겁게 통과하며 함께 자라난 한 시절을 되짚는다.
중학생 시절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메릴 스트립이 발로 냉장고 문을 닫는 장면에서 사랑에 빠졌다고 밝힌 적이 있다. 결국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상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
메릴을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는 내 한 시기를 대표하는 메타포다. 답답한 한국 사회를 벗어나고 싶어 만든 일종의 ‘도피처’였던 것도 같다. 처음엔 연기에 홀렸다. 그러다 삶을 찾아보게 됐는데, 여느 할리우드 배우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여성 단체를 찾아가 함께 일하고 발언했다. 정치적 발언을 결벽증적으로 피하는 우리나라 배우들만 보다가 그런 모습을 보니 점점 빠져들었다. 메릴이 맡은 역할도 사랑스럽거나 착한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때로는 감독, 작가, 상대 배우와 싸워 가면서까지 자기가 연기하는 여성을 말이 되는, 결이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어린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를 동경하는 마음에 그의 발언을 계정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큰 공감을 얻었다.
영화에는 SNS 계정 ‘메릴 스트립 정보봇 한국본부’를 만들고 “메릴 스트립을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한 이후, 1천600여 명의 후원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기까지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이 담겨 있다.
당연히, 처음엔 2년 반 안에 끝낸다는 야심이 있었다!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가 시작되면서 영화계의 성차별과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뜨거웠고, 그 열기와 ‘메릴 스트립 상영회’처럼 내가 벌인 일들을 담고 싶었다. 당시 상영회에 찾아온 관객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 메릴 스트립을 만나면 무엇을 묻고 싶냐고 물으면 다들 비슷한 걸 궁금해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 오래 해나가는 비법이 있나요?” “그 나이가 되면 좀 괜찮아지나요?” 메릴 스트립을 만나든 못 만나든, 유쾌하게 끝날 영화는 아니라고 예감했다.
배우 임예진, 문소리, 손수현을 비롯해 영화를 위해 70여 명의 여성을 만나 인터뷰했다. 여전히 마음에 남은 대화가 있다면?
임예진 배우다. 문소리 배우처럼 영화계 안에서 목소리를 내온 이들도 있지만, 임예진 배우는 “엄마 꼭 나가야 돼”라는 따님의 권유로 인터뷰에 응했다. 처음엔 낯설어 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 보니 힘을 보태고 싶어 했다. 많은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고 있지만 드러내지 못해서 서로 확인하지 못할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맘마미아> 싱어롱 상영회도 기억난다. 즉석에서 모인 고등학생부터 40대까지, 이런 자리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이야기해줬다. 그걸 계속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었다. 편집을 마무리하면서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진 걸 다 털어 다시 미국에 갔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아시아계, 한국 여성 필름메이커들을 만나 코로나 이후의 암울한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수미상관의 오프닝과 엔딩이 탄생했다. 영화의 엔딩은 도착이자 출발이길 바랐다. 한국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 ‘우리 이야기를 우리가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메릴 스트립을 실제로 만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 영화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각종 시위 현장까지 여러 시점으로 나뉜다. 비슷한 시기를 통과한 여성으로서 나 역시 낙태죄 폐지 논쟁부터 강남역, 신당역 사건까지 두려워하고 목소리를 낸 순간들을 되뇌길 반복했다.
그 시기는 우리 세대가 직접 거리에 나가본 가장 큰 분기점이었다. 나도 세월호 참사 시위나 탄핵 시위에 나간 적은 있지만, 진짜 나의 이야기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용기 내어 모이고 연대한 건 처음이었다. 여성 행진도 그때 처음 해봤다. 그사이 펀딩을 열고 미국 촬영을 떠났는데, 한국 확진자가 27명일 때였다. 현지에서 국경이 닫히는 걸 실시간으로 겪었고 혐오 발언도 들었다. 내가 꾸며낼 수도, 계획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으로서 무언가 기록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당역 사건과 이태원 참사 때도 카메라를 드는 것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영화에 넣지 않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나갔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실패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코로나로 오프라인 운동의 명맥이 한 번 끊겼고, 이어 백래시가 거셌다. 인터넷이 조용해진 건 실패해서가 아니다. 그 시기를 겪은 사람들이 자라서 사회로 나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연대하고 기록해온 지난 10년을 성공이나 실패가 아닌 성장으로 본다.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은 몇 살이었든 영향을 받았고, 그 전과 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앞에 있는 것보다 멀고 큰 목표에 집착하면서, 사람을 만나야만 했었다.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모르니까”라는 내레이션이 기억에 남는다. 한 대상에 사로잡혀 매혹된 경험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을 더 잘 알게 된 사람이라면 공감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뜨겁게 열광할 대상이 생겼나?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목표다. 같은 세대가 아니어도, 이 시기를 함께 지나온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저마다 개개인의 이야기가 충분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서구 문화의 소프트 파워가 압도적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이야기도 관심을 받고 있다. 여성들이 주저하지 말고 자기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한때는 영화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포맷이 달라져도 괜찮다. 시트콤에도 관심이 많다. 오래전 하와이로 도피하듯 이주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는 10월 28일 개봉한다.
Credit
- 사진/ 박효선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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