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형태가 된다면, 송은과 불가리의 전시 《LIGHT, FORM AND VISION》
보고, 맡고, 듣고. 로마의 시간을 담은 불가리의 아이코닉 컬렉션 '비제로원(B.zero1)'을 두고, 여섯 팀의 작가가 송은에서 저마다의 감각이 답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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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작업'이라는 문구가 따라붙은 작품 앞에서, 관람객의 머릿속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단지 제작 지원만 받은 작업인지, 브랜드와 작가의 세계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지, 아니면 브랜드가 정한 주제에 한쪽이 우세를 점하는지. 작가가 완전한 자율성을 준다고 좋은 전시가 되는 것도 아니며, 브랜드의 정체성에 맞춘 열정이 독이 든 성배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지금 송은에서 열리는 불가리와의 협업전 《LIGHT, FORM AND VISION: Roman Heritage in Dialogue with Korean Contemporary Art》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킨다.
메종이 어떤 예술 기관과 손을 잡느냐. 프리즈 서울 이후 패션 브랜드와 한국 미술계가 함께 걸어온 시간은 아직 길지 않으며,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불가리의 선택은 명민하다. 그룹전에 강한 송은의 이력이 빤하지 않은 전시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불가리의 아이코닉 컬렉션인 '비제로원(B.zero1)'이다. 불가리는 18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1999년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탄생한 비제로원은 로마의 건축 유산인 콜로세움을 반지 하나에 눌러 담은 컬렉션이다. 로고를 새긴 띠, 투보가스의 나선 구조, 콜로세움을 닮은 겹겹의 레이어가 시선을 붙든다. 전시는 이 요소들에서 출발해 회화, 조각, 영상, 설치, 사운드 등 20여 점의 작업으로 이식되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 김지수, 박준범, 이은우, 정영호, 최성임. 송은의 프로그램을 거친 여섯 팀의 작가들에게 로마라는 질문을 던졌고, 돌아온 답은 저마다 달랐다.
먼저 박준범은 로마의 골목 풍경을 교차시킨다. 작가는 바티칸, 트라야누스 포럼, 판테온, 빌라 줄리아를 직접 걸었다. 카메라는 건축물만큼이나 골목과 모서리, 문과 벽, 그림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남겨진 부분과 복원된 부분, 나중에 덧붙인 부분이 한 화면에 섞인다. 현지인에게는 일상, 외부인에게는 낯선 풍경. <비슷한 골목>과 <네 개의 비슷한 모서리>는 비슷하지만 같지 않은 장면을 이어 붙인다. 작가는 이를 '유사함의 불규칙한 반복'이라 부른다. 우리가 어떤 도시를 익숙하다고 느끼는 방식을 다시 묻는 작업이다.
김지수는 향으로 콜로세움에 닿는다. <시공향>은 시간, 공간, 향, 공기, 회화를 하나로 엮은 작업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서 함께 맡았을 냄새를 떠올리며, 작업실이 있는 제주의 자연에서 향을 뽑았다. 원목 모듈에 담긴 향은 벽에서 퍼져 나가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 진해졌다 옅어진다. 나무도 제 몫의 향을 낸다. "나무를 계속 다루다 보니 나무마다 고유의 체취가 있더라고요. 사람처럼 정말 다른 향이 나요. 그 체취를 제가 만든 천연 향과 연결했어요. 유독 매력적인 향을 지닌 나무 하나는 따로 있을 때 더 빛나서 떨어뜨려 설치했고요." 이웃한 벽에는 회화 <나의 시적 우주>와 <시공향>이 나란히 걸렸다. 그의 개인전 제목 《냄새 분자가 되어》는 곧 작가의 작업 방식이다. "회화를 할 때도 저는 어떤 시공간의 냄새 분자가 돼요. 명상하듯 에너지를 넓혀 주변 세계를 감각하고, 그 순간의 저를 다시 들여다보죠." 같은 자리에 서도 같은 향을 맡는다는 보장은 없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이 통로 전시장에서 유독 숨을 깊게 쉰다고 했다.
이번 전시와 시각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작업은 최성임의 <황금 이불>이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늘어진 황금빛 직조물. 고귀하고 영원해 보이지만 재료는 빵 봉지를 묶는 와이어 타이, 빵 끈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가장 가벼운 물건. 금과 빵 끈 사이의 거리가 곧 이 작품이다. 그 안에는 일상 틈틈이 끈을 엮어온 작가의 시간이 녹아 있다.
한편 송은의 지하 공간을 매운 작업은 ‘그레이코드, 지인’의 설치 작업이다. 사운드를 주 언어로 삼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룬다. 지름 7미터의 검게 반사되는 금속 원 <지속하는 것>이 공간의 기준점이다. 천장에는 콜로세움의 아치를 빌려온 <변화하는 것>이 매달려 빛을 받는다. 전시장을 따라 놓인 돌이 이 작업의 열쇠다. 요즘 유시 파리카의 『미디어의 지질학』을 읽고 있다는 두 사람은 돌에서 시간을 봤다. "콜로세움도 완성된 모습이 아니에요. 오랜 시간 깎이고 변해서 지금의 형태가 됐죠. 결국 시간이 만든 거예요. 그 시간을 가장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재료가 돌이었어요. 결이 살아 있는 돌을 찾느라 사방팔방 다 돌아다녔죠. 옛 시대의 재료가 돌과 콘크리트라면, 지금의 아름다움은 아이폰처럼 매끈하고 반짝이는 표면이잖아요. 두 시대의 재료가 시간차를 두고 함께 놓이길 바랐어요." 소리도 같은 원리로 쌓인다. 돌처럼 보이는 작은 스피커 6대가 각자 하나의 소리를 낸다. “7미터짜리 원은 56개의 조합으로 되어 있어요. 56개 음이 어떤 하모니를 내는지 구조를 짰고, 그중 6조각 정도가 확률적으로 더 자주 나오게 했어요. 루프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음악이에요. 드로잉은 그 음을 적은 악보고요.” 전체 작업의 제목은 <비어 있는 듯, 이미 가득 차 있는>. 관객들은 천천히 걸으며 이 공간이 처음부터 소리로 차 있었다는 걸 걸음을 옮기며 알게 된다.
브랜드의 자리도 눈여겨볼 만하다. 불가리 주얼리의 역사는 지하 2층 벙커룸의 '레트로스펙티브 룸'에 따로 모여 있다. 브랜드를 보고 싶은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면 된다.
같은 콜로세움에서 출발해 누구는 통로의 팝콘으로, 누구는 행성의 궤도로, 누구는 제주의 공기로 갔다. 같은 주제 아래 기시감 대신, 다양한 변주가 울린다. 커미션 작업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전시에서만큼은 답이 꽤 선명하다. 브랜드의 세계관이 예술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이번 전시는 각기 다른 시간이 형태로 옮겨질 수 있다는 증명이다.
《LIGHT, FORM AND VISION: Roman Heritage in Dialogue with Korean Contemporary Art》
전시 기간: 2026년 10월 29일(목) – 11월 14일(토)
관람 시간: 월요일 – 일요일(공휴일 휴관) 11:00 - 18:30
무료 관람
* 도슨트 투어와 자율관람은 모두 네이버 사전 예약으로 운영됩니다.
도슨트 투어의 경우 15시, 17시 총 2타임으로 진행됩니다. (일요일 제외)
전시 장소: 송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441)
Credit
- 사진 / 송은 불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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