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로에베가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에서 선보인 '이것'

“왜 이 물건을 써야 하는가”보다 “왜 이 감각을 가져야 하는가.” 티팟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로에베는 이번에도 삶의 감각을 묻는다.

프로필 by 최강선우 2025.04.18

2025년 밀라노 살로네 델 모빌레. 로에베는 또 한 번 낯선 질문을 던진다. 이번엔 티팟이다. 물을 붓고, 따르고, 마시는 기물. 그러나 로에베는 그 안에서 ‘쓰임’이 아닌 ‘존재’를 들여다본다. 올해로 9번째 행사인 올해는 티팟을 선보였다. 25인의 아티스트, 디자이너, 건축가가 해석한 올해의 컬렉션 ‘LOEWE TEAPOTS’는 감각의 전시장이 아닌, 무용함 너머의 아름다움이 지닌 구조를 실험하는 공간으로 자리했다. 오브제는 기능을 포기하는 대신 구조와 형식에 대한 질문을 품는다. 로에베는 그 질문을 감각적으로, 조용하게 확장해나간다. 이들의 전시를 네 가지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쓸모를 전복하기 로에베는 공예의 언어를 빌려, 브랜드의 철학을 말해온 몇 안 되는 패션 하우스 중 하나다. 수년간 이어온 밀라노 전시 시리즈는 조명, 바구니, 거울처럼 일상 속 우리 곁의 ‘도구’를 중심에 놓고 삶을 감각적으로 다시 정렬하는 시도를 거듭해왔다. 티팟은 연장선이자, 가장 고요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기능이 사라진 형태는 여전히 오브제일 수 있는가?’ 그리고 ‘실용성을 배재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유효한가?’ 이번 전시의 핵심은 이 질문들이다. 티팟이라는 기능 중심의 기물은 다양한 해석과 형태를 통해 해체된다. 핸들이 없는 것, 주둥이가 기울어진 것, 차를 담기엔 너무 얇거나 무거운 것. 이번 컬렉션에서 소개된 티팟들은 제 기능을 일부러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핸들이 없거나, 주둥이가 기울어졌고, 차를 담기엔 너무 작거나 무겁다. 오히려 그 결핍 덕분에 이 오브제들은 묘하게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사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제인 양 데엔

제인 양 데엔

무용한 아름다움 이번 전시에는 한국 작가 두 명이 참여했다. 건축가 조민석, 그리고 도예가 이인진. 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티팟을 재해석했다. 조민석의 티팟은 마치 작은 건축물처럼, 비례와 구조, 균형과 해체의 조형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핸들이 비틀어졌거나 주둥이가 사라진 형태. 차를 따르기 위한 그릇이라기보다, 차라는 행위를 사유하게 만드는 구조물이다. 그는 '물건을 통해 공간을 말하는 방식'을 티팟이라는 작고 밀도 높은 형태로 구현해냈다. 반면 이인진의 작업은 더 물성적이고 감각적이다. 유약이 흘러내린 듯한 표면, 불균형한 몸체, 손으로 매만진 듯한 입구. 마치 전통 도예의 문법을 따르되, 기능이 아닌 감각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그의 티팟은 시간을 담는다. 침묵을 품는다. 물을 담지 않지만, 시선을 붙잡는다.

이인진 작가

이인진 작가

손의 흔적의 깊이 참여 작가들은 각자의 손으로 ‘쓰임’을 지운다. 조선시대의 달항아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뉴욕의 세라믹 아티스트 제인 양 데엔 , 무인양품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후카사와 나오토 등은 전통 기법, 소재 재활용, 조형 실험 등을 통해 티팟을 정서의 오브제로 탈바꿈시킨다. 어떤 작업은 유약이 번져 흐르고, 어떤 것은 완전히 비정형의 몸체로 왜곡되어 있다.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대신 감각적으로 납득된다. 이번 티팟 컬렉션의 강점이자, 로에베라는 브랜드가 오랫동안 지켜온 감각의 철학이다. ‘왜 써야 하는가’보다, ‘왜 이 감각을 느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이 남는다. 사물과 삶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감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

후카사와 나오토

후카사와 나오토

다도는 결국 ‘태도’ 티팟은 단지 차를 담는 그릇이 아니다. 물 끓는 소리, 찻잔의 온도, 코끝에 닿는 향, 입안에서 퍼지는 여운까지 티팟은 감각의 밀도를 담는 기물이다.

조민석 티팟

조민석 티팟

그래서 이번 전시는 ‘브랜드 캠페인’이 아닌, 태도와 감각을 큐레이션하는 미디어에 가깝다. 전시에는 차를 둘러싼 감각들이 겹겹이 쌓인다. 공간은 시각과 후각, 촉각의 층위로 나뉘고, 차를 마신다는 일상의 감각이 얼마나 복합적인 경험인지를 체험하게 만든다. 이들이 제작한 티 코스터, 티백, 티 캔들부터 영국 티룸 포스트카드 티 Postcard Teas와 협업한 시그니처 블렌드 ‘Fiori e Sapori’까지. 차의 향은 공간에 남고, 오브제의 질감은 손끝에 남는다. 감각의 층위 안에서, 티팟은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가 된다.


찻잔과 만나는 서울의 공간들 4

실제로 좋은 찻잔 하나는 삶의 태도를 바꾼다. 쓰임을 넘은 물건은 감각의 여백을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 가까이 어디에서 이런 감각을 경험할 수 있을까? 서울에도 그런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산수화 티하우스 (@sansuhwatea)

중국과 대만 다구도 물론 많지만, xmrgl 우리나라 도예 작가들의 찻잔, 차 도구, 식기 등을 큐레이션하는 감각적인 티룸 겸 전시장. 산수화의 지하 1층 공간은 ‘밪’이라는 이름으로 작가들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전시장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 20길 21-14


TWL Shop (@twl_shop)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작가들의 아름다운 테이블웨어 브랜드를 소개하는 숍. 티세트는 물론 향, 천, 작은 도구들까지 ‘찻자리’의 감각을 섬세하게 편집한다.

아즈마야, 작가 타카노 에리와 같이 일본의 제품은 물론 FOH 포包°의 스트레이너, 손세은 작가의 찻잔처럼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한 국내 제품들을 만날 수 있어 방문하기만 해도 즐겁다.

주소 서울시 용산구 녹사평대로40나길 34


이악 크래프트 쇼룸 (@iaac_crafts)

2013년 문을 연 세라믹 스튜디오 이악크래프트의 전현지 작가의 작업들은 찻자리를 좀 더 우아하고 정갈하게 만들어준다. 흙으로부터 생동하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형태로 빚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화려한 기교 대신 자연의 색을 담은 그의 정갈한 세라믹 웨어를 마음껏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

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42길 15 1층


델픽 안국 플래그십 스토어 (@delphic_official)

지난해 2월 종로구 계동길에 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쇼룸과 전시 공간 뮤지엄 헤드를 열었다. 바에 앉았을 때 통창을 통해 보이는 북촌 풍경과 잎차의 향미와 맛, 온도, 다구 등 복합적으로 경험하며 오감을 밝혀주는 시간을 오롯하고 고요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깔끔하고 한국적 미학이 드러나는 작품이 많은 편.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84-3


티팟은 그저 물을 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마시는 구조물이 되었다. 좋은 찻잔 하나는 결국 삶의 태도를 바꾼다. 쓸모를 넘어선 물건은, 감각의 여백을 만든다. 로에베는 이번 전시를 통해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쓰임의 유무로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삶의 감각을 바꿔준다면 그것이 삶의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Credit

  • 사진/ 로에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