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소리를 시각화 하기, 크리스틴 선 킴의 작품은 정치적이다

바자전에서 볼 수 있는 크리스틴 선 킴의 드로잉과 영상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통한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5.08.21

3+ ART STORIES



세 번째 바자전 «IN-BETWEEN»에서 한껏 예술을 향유했다면, 이제 작가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볼 차례. 니키 리, 크리스틴 선 킴, 엠마누엘 한. 경계 너머를 감각해온 세 창작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자전 : IN-BETWEEN» 전시 전경. 마주 본 영상은 크리스틴 선 킴과 토마스 마더가 함께한 <LOOKY LOOKY>다.

«바자전 : IN-BETWEEN» 전시 전경. 마주 본 영상은 크리스틴 선 킴과 토마스 마더가 함께한 <LOOKY LOOKY>다.

크리스틴 선 킴 Christine Sun Kim


하퍼스 바자 올해 바자전은 ‘IN-BETWEEN’이라는 큰 주제 안에 있습니다. 직역하면 ‘사이’라는 공간적인 의미가 있고, 동시에 ‘존재한다(BE)’는 뜻을 강조해요. 당신의 작품은 이 주제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크리스틴 선 킴 저는 청각장애인으로서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경계, 혹은 주변부에 있어왔습니다. 때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죠. 지금도 우리의 위치는 불분명해요.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청각장애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일입니다. 애초에 시스템의 일부가 아니니까요. 이 사실만으로도 제 작업이 전시의 주제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퍼스 바자 관람객들은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목탄으로 작업한 드로잉 연작 <More Than One Time>을 마주하게 됩니다. 각각의 작품에는 ‘Time 1, 2, 3…’ 같은 식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죠. 소용돌이 치는 듯한 검은 원과 ‘시간’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연결되나요?

크리스틴 선 킴 미국 수어로 ‘sometimes(가끔)’를 표현할 때 손바닥 위 허공에다 집게손가락으로 두 번 작은 원을 그립니다. 나는 이 방식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다섯 점의 드로잉은 바로 그 궤적을 시각화한 겁니다. 원의 형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순환과 반복, 리듬감 같은 여러 의미가 떠올라요. 모두 시간의 속성이죠. 저는 ‘가끔’을 말할 때, 그러니까 손가락이 다른 한쪽 손바닥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시간이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 생각해요. 가끔이라는 말도 그렇지 않나요? 즉흥적이고 우연한 타이밍을 뜻할 때도 있지만, 규칙적이고 정확한 시간 간격으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한마디로 5점의 <Time>은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의 밀도와 크기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하퍼스 바자 이 다음으로는 3점의 영상 작품이 이어져요. 지난 7월 막을 내린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을 비롯해 최근 전시에서 텍스트를 포함하는 평면 드로잉을 주로 선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영상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전시 작품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요?

크리스틴 선 킴 텍스트는 목소리를 쓰지 않는 저와 수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접점이에요. 의미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지인 셈이죠.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서 다수의 영상을 택한 건 드로잉이나 텍스트보다 더 깊이 있게 서사를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 토마스 마더(Thomas Mader)와의 협업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토마스는 독일인 예술가이자 제 남편이에요. 우리는 2016년, 처음으로 함께 작업한 <Classified Digits>라는 영상에서 ‘헬핑 핸즈(helping hands, 두 사람이 앞뒤로 나란히 서 있는 상태에서 뒷사람이 앞사람의 손 역할을 해주는 게임. 손이 잘 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전시장에서 각각 2018년, 2021년에 작업한 두 편의 영상 <LOOKY LOOKY>와 <Find Face>를 통해 그 이후 유지되어온 우리의 영상 미학이 애니메이션을 접목하며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하퍼스 바자 <LOOKY LOOKY>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화면을 통해 대화하는 당신과 토마스는 손을 사용하지 않은 채 얼굴 표정이나 고갯짓만 주고받습니다. <Classified Digits>와 다른 점이죠.

크리스틴 선 킴 미국 수어에는 손을 전혀 쓰지 않지만 ‘수어’로 간주되는 기호들이 있습니다. 이를 비수지 기호(Non-Manual Signs)라 칭하는데요, 이 영상은 오직 비수지 기호만으로 나눈 대화예요. 토마스가 눈짓, 고개 움직임, 입 모양으로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대화는 시작됩니다. 저는 짜증과 경계심을 드러내거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호감을 표하며 반응하고요. 실제로 타인에 대한 얘기를 은밀하게 주고받고 싶을 때 유용하게 쓰는 방법이에요.(웃음) 여기에 자막을 더해 상황 설명을 보완하고 약간의 유머도 곁들였습니다.

하퍼스 바자 <Find Face>에서 번갈아 등장하는 당신과 토마스는 같은 손동작을 쓰되, 얼굴 표정만 다른 단어들을 보여줍니다. 수어에서 얼굴 표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의 작품처럼 보이는데요.

크리스틴 선 킴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토마스는 <LOOKY LOOKY>보다 <Find Face>에서 미국 수어에 조금 더 능숙해졌어요.(웃음) 두 작품 사이에는 3년의 시간이 있었는데요. 그 점만 빼면 메시지는 그대로입니다. 2021년 작업을 했을 당시 스냅챗,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얼굴 필터 앱이 한창 발전하는 중이었어요. 여러 플랫폼에서 다양한 필터들을 써본 결과, 하나같이 손이 이목구비를 가릴 때마다 얼굴을 인식하지 못해 ‘Find Face!’라는 메시지가 떴죠. 마치 수어를 하는 손이 필터의 일을 방해라도 한다는 듯이요. 기술이 전제하고 있는 ‘보편적 얼굴’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수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얼굴 표정의 역할이 얼마나 과소평가되는지 보여주기도 해요.

Christine Sun Kim, <Cues on Point>, 2022, Two channel digital video, 04 min 21sec (Video Still). Courtesy of the Artist and Francois Ghebaly, Los Angeles, New York.

Christine Sun Kim, <Cues on Point>, 2022, Two channel digital video, 04 min 21sec (Video Still). Courtesy of the Artist and Francois Ghebaly, Los Angeles, New York.

하퍼스 바자 전시 동선 마지막에 놓인 <Cues on Point>는 5년 전 슈퍼볼에서 미국 국가를 수어로 공연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합니다. 영상에는 당신의 오랜 파트너인 미국 수어 통역가 베스 스테일(Beth Staehle)만 등장해요. 슈퍼볼이라는 대중적 플랫폼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스스로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이와 같은 방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크리스틴 선 킴 슈퍼볼에서 미국 국가를 공연한 건 큰 도전이었습니다. 철저히 가수의 진행 시간에 맞추느라 리허설은 행사 이틀 전,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었고, 베스와 저는 거의 하루 만에 우리만의 큐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어요. 가수의 노래 진행 속도에 정확히 맞춰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수어 공연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베스의 큐 덕분이었죠. 공연이 끝나자마자 영상을 만들고 싶었지만 팬데믹 때문에 2년이 지나서야 촬영을 할 수 있었고요. 이 영상은 제가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모든 통역사들, 특히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함께해온 통역사들에 대한 헌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메라는 오직 베스에게 향해 있어요.

하퍼스 바자 인터뷰 전 워드 4페이지 분량의 ‘Access Rider’ 파일을 보내왔습니다. 여기엔 사용에 주의해야 할 단어를 비롯해 청각장애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가 담겨 있어요. 베스나 토마스처럼 작업에 함께하는 협업자들에게는 어떤 것을 당부하나요?

크리스틴 선 킴 앞서 언급한 베스 스테일뿐만 아니라, 제 드로잉을 벽화로 작업해주는 영국 작가 제이크 켄트(Jake Kent)도 핵심 팀원입니다. 이제 베스는 제 농담 스타일까지 파악하고 있어 거의 오차 없이 통역을 해요. 역시나 저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제이크는 이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사진으로 피드백만 받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 팀이 되기까지 아주 디테일한 것들을 따지고 들어야 했어요. 사사로운 것 하나까지 공유하며 합을 맞춰간다는 게, 말은 쉽지만 정말 번거로운 일이잖아요. ‘Access Rider’는 말하자면 내 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 같은 거예요.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려도 일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데에는 결국 시스템이 필요하죠.

하퍼스 바자 2018년 작업 <LOOKY LOOKY>부터 작년에 그린 <Time> 연작까지, 작업 시기 순으로 놓고 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게 있어요. 근작에 가까워질수록 당신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유머를 사용하는 방식이 소극적이어졌다는 점인데요. 되려 유머보다는 날카롭게 비트는 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크리스틴 선 킴 정확히 보셨네요. 제 생각에 이건 관람객에 대한 신뢰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작업 초반에는 사람들이 과연 제 작업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할지 끊임없이 의심했거든요. 교조적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어떤 형식을 가져다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쓴다 한들 내 의도가 잘 작용할지 확신도 없었어요. 그래서 유머를 쓸 땐 직접적이어야 했죠. 한 번에,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작업을 이어갈수록 내 안에 뭉툭했던 것들이 뾰족해지고 관람객들이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그 방식이 변한 것 아닐까요? 전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하퍼스 바자 앞서 “청각장애인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답변에 따르면, 당신의 작업 또한 다분히 정치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머가 작업의 본질을 흐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나요?

크리스틴 선 킴 유머는 관람객이 저와 같은 공간에 머무르게 해주는 도구예요. 피식 실소를 터뜨릴 때 캔버스나 스크린 너머 모호하게 느껴졌던 작가의 존재를 보다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죠. 사람들이 저를 너무 심각하고 무거운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동시에, 저와 제 작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길 바랍니다.

하퍼스 바자 당신에게는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 외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그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죠.

크리스틴 선 킴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저에겐 어린 시절 명절마다 늘 대규모 가족 모임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정을 꾸린 뒤로는 LA 기반의 한인 디아스포라 예술인 모임 교포(GYOPO)에서 활동하며 한국 친구들을 만나곤 했죠. 작품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언제나 느끼고는 있어요.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는 지금도 종종 나에게 한국과 미국의 문화가 뒤섞여 작용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많거든요. 이민이라는 것은 아주 복잡한 일인 것 같아요. 독일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도 저와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겠죠? 요즘은 아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뿌리에 대해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Christine Sun Kim, <Time5>, 2024, Charcoal on paper, 42x42cm, Framed dimension: 43.5x43.5cm(detail).

Christine Sun Kim, <Time5>, 2024, Charcoal on paper, 42x42cm, Framed dimension: 43.5x43.5cm(detail).

하퍼스 바자 지난 2월 한 인터뷰에서 “많은 것에 집착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더군요.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더 나아가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하루 종일, 밤낮으로 생각한다고요. 요즘 당신이 가장 몰두해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크리스틴 선 킴 요즘은 서로 다른 마음의 질량을 탐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이를테면 각기 다른 한숨의 무게 같은 것들이요. 언젠가 새로운 연작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저에겐 확실히 아주 집요한 구석이 있어요. 두 아이의 부모로서 가정을 살피며 일을 병행하는 건 확실히 힘든 일이지만, 아직까지 이 집요함이 번아웃으로 이어진 적은 없어요. 저는 이 일을 정말 즐기거든요! 그럼에도 이따금 나에게 더 이상의 여유 공간이 없다 느껴질 땐 일단 혼자가 됩니다. 그리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가벼운 영화 하나를 틀어 둔 뒤 와인 한 잔을 따라요. 얼마 못 가 영화가 시시해지면 하염없이 틱톡을 스크롤하는 거예요. 몇 날 며칠은 그렇게 보내야 머릿속을 완전히 비울 수 있어요.

하퍼스 바자 평소 밈이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죠. 최근 인상 깊게 본 것이 있나요?

크리스틴 선 킴 며칠 전 드디어 2015년에 만들어진 우크라이나 영화 <트라이브>를 봤어요. 대사가 전혀 없고, 소리 자막만 있는 작품이죠. 청각장애 청소년들이 청각장애 학교에 다니며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민망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대놓고 청인들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티가 났거든요. 몇몇 장면은 좋았지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신이 많더라고요. 어젯밤에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인 제시 암스트롱(Jesse Armstrong)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마운틴헤드>를 봤네요. 테크 재벌들을 다룬 영화였는데,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너무 싫었어요. 세상은 무너지고 있는데 은행 계좌에 수십억 달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대단한 힘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죠. 돈이 여전히 권력인 줄 알고요. 딱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에요.

하퍼스 바자 힘, 권력은 당신이 속해 있다고 말한 ‘주변’ ‘경계’와 반대 속성을 지녔어요. 당신은 지금 청각장애인, 그리고 예술가로서 작업을 통해 바로 그 반대의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중이고요. 현재진행형인 이 작업이 언젠가 완결형이 되었을 때, 당신은 어디에 가 있을까요?

크리스틴 선 킴 저에게 있어 도달하고 싶은 ‘궁극적인 세계’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가까운 미래를 어렴풋하게 그리며 매일 할 일을 해낼 뿐이에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요. 최근에는 일본 도쿄에서 멋진 한 주를 보냈어요. 모리 미술관 전시부터 치바 공과대학과의 대담까지 마치고 보니 서울에서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내다보는 미래는 이 정도예요. 저는 우연성 음악(Chance Music)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나 폴린 올리베로스(Pauline Oliveros) 같은 예술가를 좋아해요. 이들은 급진적입니다. 사회적 압박이나 대중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에요. 백남준도 그런 인물 중 하나죠. 저는 계속해서 자기만의 규칙 안에서 성실히 작업한 예술가들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자극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Credit

  • 사진/ 유동군(전경), 아티스트 제공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