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엠마누엘 한이 LA 사막에서 한복 입은 여인을 찍은 이유
바자전 아티스트로서 국내에서 처음 전시를 통해 대표작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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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바자전 «IN-BETWEEN»에서 한껏 예술을 향유했다면, 이제 작가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볼 차례. 니키 리, 크리스틴 선 킴, 엠마누엘 한. 경계 너머를 감각해온 세 창작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Emanuel Hahn, <The Lovers I>, 2023, IIford Fineart Textured Silk, 45x60 in.
엠마누엘 한 Emanuel Han
하퍼스 바자 <바자>의 세 번째 전시에 참여 작가로 제안받았을 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올랐나요?
엠마누엘 한 올초 LA의 갤러리 고비 로스앤젤레스(Gobi Los Angeles)에서 개인전을 함께 준비한 기획자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 주제도 모른채 바로 “yes!”를 외쳤어요.(웃음) 나중에서야 ‘In-Between’이라는 주제를 듣고 “완전 내 얘기잖아!” 싶었죠. 평생을 사이 감각 속에 살았기에 주제가 너무 자연스럽게 와닿았거든요.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에 선보인 연작 <American Fever>가 이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퍼스 바자 아시아계 증오 범죄 피해자 가족을 담은 사진으로 <타임> 커버를 장식하고, 팬데믹 기간 동안 LA 한인타운의 소상공인들을 촬영한 첫 사진집 <Koreatown Dreaming>을 펴내는 등 꾸준히 이민자의 삶을 기록해왔죠. 그래서인지 처음 작업을 보았을 때 LA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국계 미국인일 거라 예상했어요.
엠마누엘 한 제 배경은 좀 특이한 편인 것 같아요. 사이판에서 미국 시민권을 갖고 태어났지만 20살 때 대학을 가기 전까지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이 없거든요. 유년 시절은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캄보디아와 싱가포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말 그대로 ‘서드 컬처 키드’의 삶을 살았죠. “나는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싱가포르인인가? 캄보디아인인가?” 매 순간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질문이 늘 저를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여느 10대처럼 미국 대중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한편으로는 언젠가 미국에 갈 거야, 라는 확신이 있었지만요. 이미 정체성이 얼추 형성된 스무 살 때 처음 미국에 오면서 느낀 건, 항상 제가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는 점이었어요. 교포 친구들과 달리, 미국은 제게 새로운 사회였고 외부인이자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민자 역사와 경험을 보게 되었죠. “나는 이 역사 속에 어디에 위치하는 걸까?” 한인 미국사를 파고들며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런 경험이 쌓여 이 작업을 가능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완전히 미국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고, 다양한 문화를 품고 싶은 욕구가 커요. 동양과 서양, 미국과 한국, 두 문화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고 조합하는 작업이 내겐 일종의 레고 블럭처럼 느껴진달까요. 이 문화에서 알게 된 조각, 저 문화에서 배운 조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조립하는 식으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American Fever> 연작을 한 단어로 정의했을 때, 작가는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전시장 한편에 미 서부영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바 형식의 세트를 만들고 네온사인을 배치해, 관람객이 작업 속 일부가 되는 경험을 선사했다.
하퍼스 바자 금융을 전공한 뒤 테크 회사에 다니다 갑작스레 사진가의 길에 들어선 이력도 독특해요. 사진이란 매체에 이끌리게 된 순간은 언제였나요?
엠마누엘 한 영화를 좋아해 뉴욕의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시네마토그래피 수업을 잠깐 들은 계기가 인생을 완전히 바꿨죠.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살면서 가장 명확한 계시를 받은 순간이지 않을까. 1년만 내 작업을 해보자고 정했고, 친구와 함께 미시시피 지역 중국인 커뮤니티를 찍은 <Mississippi Delta Chinese>가 <뉴욕 타임스> 같은 매체에 실리며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내 작업을 알릴 수 있었어요. 확신을 얻는 전환점을 맞았죠. 그 후 브루클린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을 담는 작업을 하고, 팬데믹 기간에 LA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상업 프로젝트와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퍼스 바자 이번 전시에서 18점의 연출 사진과 2점의 영상을 포함한 연작 <American Fever>를 공개했어요. 그간의 다큐멘터리 작업과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연결되나요?
엠마누엘 한 2년여간 준비한 첫 사진집을 낸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제 스스로 세계관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어느 학술지에서 ‘미국병’이란 단어를 발견한 순간, 일종의 ‘컨테이너’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이민자에 관해 쌓아온 생각들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처럼요. 2021년 무렵 시작한 <American Fever>는 한국 이민자의 여정을 시각화해 한 편의 극본처럼 보여주는 작업이에요. 스토리 보드를 만들고 캐릭터, 세트, 로케이션, 스타일링 등 모든 장면을 하나씩 연출해온 결과물이죠.
하퍼스 바자 작품들은 1970년대 미국으로의 대이민이 이루어진 시기를 배경 삼습니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나요?
엠마누엘 한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1970년대부터 한국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어요. 사진집을 위해 1세대 이민자들과 대화 나누며 그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죠. 연작들은 이민의 시작 부분인 ‘Arrival’부터 한 사회에 동화되는 중간 지점인 ‘Disillusion’, 마지막으로 이민 1세대의 황혼기를 다루는 ‘Ending’까지 세 파트로 느슨하게 나뉘어요. 세 가지 에피소드를 각기 다른 인물로 풀어가는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Mystery Train>에 큰 영향을 받았죠. 미국에 막 도착해 원대한 꿈을 꾸는 젊은 부부, 미국 사회의 문화를 흡수하며 적응하다가 일종의 환멸을 느끼고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을 맞는 이를, 결국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노인 등 다양한 인물과 배경에 담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엔딩 파트를 새롭게 촬영했어요.
하퍼스 바자 포드 머스탱, 모터사이클, 무궁화, 한복 등 프레임 안에는 미국적 환상과 한국적 정체성을 띤 이미지가 뒤섞여 있어요. 다채로운 상징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취사선택한 건가요?
엠마누엘 한 한편에는 누가 보아도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상징을 배치하고, 다른 한편에는 ‘아메리카나’, 즉 미 서부와 미국 문화를 떠올렸을 때 낭만화된 이미지를 넣고자 했어요. 후자는 대체로 명확하죠. 그 시대 영화에는 자주 말리부 해변과 산타모니카산맥의 일몰이 나오고, 스포츠카와 ‘헬스 엔젤스’ 같은 반항적인 바이커 클럽이 등장해요. 한국적인 상징들은 많은 리서치와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명확한 프로세스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정말 한국적인가?” 같은 질문을 계속 품은 채 좁혀나갔죠. 예를 들어 ‘줄타기’는 거의 1년 내내 떠올렸던 이미지예요. 줄타기라는 전통 곡예 퍼포먼스는 시각적으로도 정말 멋있지만, 움직임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균형을 잡으며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이민자의 삶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아슬아슬, 한 번의 실수로 줄에서 떨어지면 완전히 인생이 뒤흔들리는. 또, ‘무궁화’의 경우, 영어로 ‘Rose of Sharon’이라 표현하는데, 성경의 맥락과 맞닿아 있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사막에서도 꽃을 피우는 히비스커스 종의 강인한 생명력이 삶을 은유하는 것 같았죠.
하퍼스 바자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시키는 구도(<Rose of Sharon>)나, 한때 휴양지로 번성했던 솔튼 해변 같은 배경(<The Arrival I>)처럼, 장면을 구성하는 구도나 배경을 고를 때는 어떤 점을 고심하나요?
엠마누엘 한 1970~80년대 미국 영화, 빔 벤더스, 짐 자무시 같은 감독들이 미국적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에 많은 영감을 받는 편이에요. 또 ‘Staged Narrative’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사진가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작업 방식에도 큰 영향을 받았죠. 크루드슨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미 북동부 전역을 돌아다니며 로케이션을 찾고, 영화 세트처럼 공간을 제작하는 개념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직설적인 묘사는 피하려 해요. 미술사의 요소를 참고해 신작 <Year of the Horse I, II>에 등장하는 말은 초현실주의 맥락에서 사후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차용했어요, 나이 든 이민자 1세대 남성과, 1세대의 풍요를 업고 말을 탄 젊은 여성이 등장하죠. 가끔은 저조차 왜 이런 구도여야 하는지 모른 채 어떤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 놓인 것 같기도 해요. 주로 무의식적인 부분이 드러날 때가 많죠.

«바자전 : IN-BETWEEN» 전시 전경. 엠마누엘 한의 영상 작품 <Miss Koreatown>의 한 장면.
하퍼스 바자 모델을 캐스팅할 때는 어떤 기준을 거치나요?
엠마누엘 한 스토리보드에 가장 잘 맞는 인물을 발견하기 위해 에이전시를 찾거나 지인을 수소문하는 등 다양한 캐스팅 과정을 거쳐요. 일례로 <Miss Koreatown>은 1980~90년대 한인타운에서 미인대회가 자주 열렸고, 관련된 사진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발견해 저만의 방식으로 풀고 싶었던 작업이예요. 당시 미인대회는 이민자들이 모국의 전통과 자긍심을 공동체 안에서 재현하는 행사였지만, “오늘날 LA와 같은 다인종 도시에서 ‘한국적인 미’는 무엇일까?” 묻고 싶었습니다. 작업에 등장하는 세 여성 모델 중 민지는 백인과 한국인 혼혈인 전문 모델이고, 아리는 푸에르토리코인과 한국인 혼혈의 지인이에요. 블레어는 틱톡에서 자신의 한국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를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섭외했죠. ‘내가 사는 풍경’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걸 고려하며 요소를 구성하려 해요.
하퍼스 바자 피사체 속 인물들은 대체로 감정을 절제하는 듯 보여요.
엠마누엘 한 종종 감정이 없는 듯 중립적인 인상을 받는다는 피드백이 있는데, 이민자의 경험에는 항상 어떤 ‘그리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고국에 두고 온, 남겨진 것들에 대한 감정, 그걸 다시 돌아볼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잃은 채 계속 살아갈 때 느끼는 아련함. 그래서 인물들이 마냥 행복하거나 들떠 있는 상태와 거리가 먼 것 같아요. 제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고.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만이 느끼는 긴장이나 미묘한 감정일 수도 있겠죠.
하퍼스 바자 내러티브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엠마누엘 한 완벽한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도 현장에서 유연함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이지 않을까 싶어요. 촬영 전 스케치를 세세히 그려놓은 상태에서도, 현장에서는 늘 더할 게 생기죠. <줄타기>를 구성할 때 원래는 남성 모델만 등장시키려 했어요. 안전상 모델이 점프하는 컷을 따로 찍고 후반 작업에서 합성하다가, 반대편에 여성 모델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여성 모델을 섭외해 배치해 완성한 작업이에요. <The Lovers>를 촬영할 당시엔, 캘리포니아의 겨울이 워낙 흐리기 때문에 말리부 절벽 해안가에 모든 걸 다 세팅해두었지만 구름이 전혀 걷히지 않았어요. 아무리 조명으로 세팅을 해도 원하던 빛을 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철수하려던 순간, 갑자기 단 10분간 구름이 걷히고 강한 햇빛이 들어왔을 때 촬영해 얻은 결과물이죠. 저는 반응하기보단 생각하는 타입의 사진가 같아요. 더 나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생기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작업을 완성하죠. 그때가 저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퍼스 바자 당신의 세계관을 보여주고자 작업해온 결과물이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을 만난 지금, 창작자로서 어떤 다음을 그리고 있나요?
엠마누엘 한 전시를 통해 짧지 않은 시간 작업해온 <American Fever>를 마무리 짓는 계기를 맞이할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작업을 보고 단지 “멋있다”라 느껴도 충분하지만, “이 이미지는 무슨 이야기를 품고 있지?” 질문하며 역사나 문화에 대해 궁금해지고 알아보고 싶어진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이번 전시에서 짧은 단편영화 두 편을 공개했는데, 사진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Credit
- 사진/ 유동군(전경), 아티스트 제공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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