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EBRITY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찍으며 유태오가 떠올린 생각들

“제가 연기를 선택한 게 아니라 연기가 저를 선택했다고 느껴요.”

프로필 by 안서경 2024.01.19
톱, 카디건, 코트는 모두 Zegna.


하퍼스 바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국내 3월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지난해 먼저 개봉한 해외에선 반응이 뜨거워요. 해외 일정을 소화하다 잠시 한국에 머물 때 <바자>와 만났어요.
유태오 CJ와 A24가 공동 제작한 첫 영화라 오디션을 볼 때부터 욕심이 났는데, 처음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눈물이 났어요. 너무 아름다운 영화여서 꼭 함께하고 싶었는데, 캐스팅 소식을 듣고 기뻤죠. A24는 독보적인 시스템을 갖춘 독립영화 스튜디오라 미국에서 영화 홍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우며 좋은 경험을 쌓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시나리오를 읽고 왜 눈물이 흐른 걸까요?
유태오 마지막 순간 노라와 해성이 주고받은 대화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만약 지금 이 생이 전생이라면 다음 생은 서로에게 우린 무엇일까?” “몰라, 그때 보자” 하고 살짝 미소 지으며 헤어져요. 장면을 상상하니 그 정서가 그대로 전해지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나영’과 ‘해성’이 20여 년 만에 뉴욕에서 이틀간 재회하는 이야기예요.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나영(노라)은 남편 ‘아서’를 만나게 되고, 세 사람이 함께 만나는 기이한 광경도 연출되죠. 얽히고설킨 관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감정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더군요.
유태오 멜랑콜리라는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외로움 같은 한 가지 단어로는 압축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죠. 영화의 주제인 인연이라는 관념을 공부하면서, 철학과 불교 사상 등을 제 삶과 연관지어 생각해보게 된 점이 무척 특별했어요.
셔츠, 코트, 팬츠, 타이, 슈즈는 모두 The Row.



하퍼스 바자 독일 쾰른에서 태어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유태오라는 배우가 한국에서 자라온 해성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비교적 최근작인 <레토>의 빅토르 최 혹은 <연애대전>의 톱 배우 남강호 등 비범한 역할을 맡아왔잖아요.
유태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배우를 캐스팅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한국 배우라는 정체성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뿌듯함이 컸죠. 해성은 저와 달리 뼛속까지 논리적인 공대생이고, 말투부터 몸동작까지 갇혀 있는 인물이에요. 그 느낌을 어떻게 만들지 내내 고민했어요.
하퍼스 바자 20대에 배우를 꿈꾸던 뉴욕에서 영화를 촬영한 기분은 어땠어요?
유태오 먼 길을 한 바퀴 왕복해 돌아온 기분이었어요. 노라 역을 맡은 그레타 리, 아서 역의 존 마가로, 감독인 셀린 송까지 모두 뉴욕 출신이고 넷 다 20년 전 그곳에서 웨이터 서빙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배고픈 시절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뉴욕 한가운데에서 길거리를 통제하고, 곳곳에 한국어가 쓰인 타이틀이 붙어 있고, 제 이름이 쓰인 의자가 놓여 있고. 꿈같은 상황이었죠.
하퍼스 바자 이방인의 정서를 잘 이해할 거란 인상 때문인지, 태오 씨는 세 사람 중 노라의 심정에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봤어요.
유태오 저는 아서 역할에 더 공감 갔어요. 배우자를 서포트하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편이어서. 독일에 남아 있는 첫사랑도 없고요. (웃음)
하퍼스 바자 세 사람이 바에서 모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유태오 아서와 해성, 두 남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성숙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노라가 없을 때 둘은 “우리도 인연이다”라는 말을 주고받아요. 남자끼리 조건 없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죠. 그건 과거와 다른 남성상이고요. 둘 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해성이 사랑하는 건 과거의 정체성이고 아서는 현재 혹은 미래의 정체성을 사랑해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의 편이 되어 한 명을 응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벗어났으면 싶은 바람이 있어요. 어떤 커플이든 사랑을 할 때 조금 더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한 관객이 “왜 노라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캐릭터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셀린 감독과 저희 모두 그 시각을 벗어나 세 사람의 인연이, 인생이 흐르는 시간을 들여다봐주길 바랐어요.
셔츠, 팬츠, 슈즈는 모두 The Row.

하퍼스 바자 얼마 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선 아서와 해성의 감정에 대해 ‘vulnerability’의 관점에서 받아들였다고 말하기도 했죠.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말해준다면요?
유태오 사실 이 단어는 한국어나 독일어같이 다른 나라의 말로 딱 떨어지게 번역이 안 돼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 취약한 점을 내보인다는 게 미국 문화에선 긍정적인 의미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 말이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는 부정적인 뜻이거든요. 배우로서 한 단어를 인식할 때 저는 문화적인 맥락과 감수성을 연관지어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독일과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제 배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요.
하퍼스 바자 그만큼 감정의 스펙트럼이 더 넓다는 뜻이기도 하겠어요.
유태오 감정이 풍부하다기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커요.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집요한 성격이죠. ‘이 감정은, 이 뜻은 뭐지?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어릴 땐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저는 늘 정확하고 싶은데, 짚고 넘어가면 피곤한 성격이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오히려 말을 안 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외로운 사람이 되길 자처하는 거죠.
하퍼스 바자 자발적인 아웃사이더가 되는 거네요.
유태오 그렇게 살기로 제가 택한 거니까.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그런 감정을 해소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해소가 안 되었다면 아마 엄청 복잡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을까.
니트 톱, 쇼츠, 스커트는 모두 Dior Men.


하퍼스 바자 트레일러에서 노라는 아서에게 ‘인연’, 전생이라는 관념을 영어로 ‘fate’와 ‘providence’, 운명과 섭리라는 단어로 설명하죠. 결과적으로 영화의 주제인 인연에 대해 어떻게 해석했나요?
유태오 그 개념을 이해하려 할수록 배우로서 제 신념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어요. 이전에는 테크닉적으로 잘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면, 생각이 달라졌죠.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연기자라는 직업은 과거 원시시대에 사람과 영혼을 이어주는, 무당 같은 ‘영매’가 하던 일을 대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삶을 재현하고 스토리텔링해 전달하는 일. 작품이 끝나도 그 인물은 제게 남아 있고 제 인생 전반을 뒤흔들고, 영향을 미치니까. 해성 역을 준비하며 제가 맞닥뜨리는 상황을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하퍼스 바자 운명론적인 접근이네요.
유태오 우주적인 거죠.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도 비슷한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맡은 역할들이 저와 인연이라면, 현실 속에서 혹은 어떤 유니버스 안에서 그 역할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은 거예요. 더 이상 기술적으로 저를 설득할 필요가 없게 된 거죠. 사실 70살까지 제가 배우로서 하고 싶은 것들을 정해뒀어요.
톱, 데님 팬츠는 Marni. 목걸이는 Tom Wood.


하퍼스 바자 데뷔 초 어느 인터뷰에선 롤모델이 없어 어려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배우로 살아온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니 어떻던가요?
유태오 인지도가 없던 시절엔 4회쯤 등장하는 악역을 맡거나 임팩트 있는 신 스틸러 역할을 주로 맡았어요. 일찍 죽는 캐릭터들이죠.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악역이었고, <초콜릿>에서는 윤계상 씨의 절친으로 3회에서 죽고. 그러다가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의 커리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기 시작했어요. 남자 배우들은 20대 신인으로 시작해 전성기를 40살에서 60살까지 보내더라고요. 때는 달라도 히스 레저도, 덴젤 워싱턴도 비슷한 역할을 맡다가 자기 색을 확실히 보여주는 시기가 있었죠. 매튜 매커너히는 10년 동안 로맨틱코미디만 하다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드라마틱한 주연을 맡았고요. 그런 궤적을 보면서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글로벌 시장에선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게 됐어요.
하퍼스 바자 최근 미국 넷플릭스 시리즈 <더 리크루트> 시즌 2에 국정원 요원으로 합류하게 됐어요. 노아 센티네오와 함께 주연을 맡게 되었죠.
유태오 오디션부터 노아와 케미가 잘 맞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더라고요. 영화 <버디버디>도 떠오르고.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액션, 코미디가 가미된 장르이기도 하고. 스토리, 플랫폼 모두 중요하지만 우선은 노아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커요.
하퍼스 바자 인터뷰마다 ‘한국 대표 배우’로 인정받는 게 목표라고 밝혀왔죠. 그 목표는 여전한가요?
유태오 오만한 욕심인가? 저처럼 얘기하는 배우들 많지 않나요?
하퍼스 바자 신인 배우들은 간혹 있죠.
유태오 반응이 두렵기도 해서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자꾸 입 밖으로 말하고 싶어요. 월드컵,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인정받는데 배우들은 왜 그런 발언이 드물까요?
하퍼스 바자 지금의 유태오는 자신의 쓰임을 잘 아는 배우라는 생각이 드네요.
유태오 연기는 제 꿈이었고, 꿈이고 지금 저는 제가 연기를 선택한 게 아니라 연기가 저를 선택했다고 느껴요.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이고, 꾸준히 할 뿐이죠. 제 멋대로.

Credit

  • 사진/ 박배
  • 헤어/ 김건형(순수)
  • 메이크업/ 엄지(키츠)
  • 스타일리스트/ 전진오
  • 어시스턴트/ 허지수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