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한국문학계 최고의 역주행작, 양귀자의 <모순>
양귀자의 네 번째 장편소설 <모순>은 단연 한국 문학계 최고의 역주행작이다. 1998년 출간된 소설이 왜 지금 하나의 현상처럼 떠오른 걸까?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_p14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_p17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을 투자한다. _p64
24살, 대학 도서관에서 <모순>을 펼쳤을 때 나는 안진진이 좀 재수 없었다. 그때 내 인생 제일 큰 고민이라곤 졸업 작품 시나리오를 어떻게 쓸지가 전부였다. 남들처럼 기업은 가기 싫고(눈에 띄는 스펙은 딱히 없었다) ‘뭐든 해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용돈을 꼬박꼬박 타며 언론 고시 준비를 마음먹고 있을 때였다. 현실 감각이 제로였다. 그런 내게 생물학적 나이는 고작 한 살 많은데, 결혼이든 돈이든 세상 물정에 이토록 밝은 화자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온갖 사연의 독립영화는 많이 봤는데, 나는 왜 안진진 같은 생각을 못할까?’(그래서 못했을 것이다.) 삶의 진리에 통달한 듯한 안진진이 어쩐지 얄미웠고, 그렇게 그 책을 잊었다. 서른 살이 훌쩍 넘었고, 내 삶은 달라졌다. 불운이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며 내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돌아오는 결과도 있다는 쓰디쓴 경험을 몇 차례 겪고 나서, 이 책은 다르게 읽힌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선언 같은 도입부를 다시 읽자 마치 최승자의 시 ‘서른’의 구절처럼 마음에 콕 박혔다.
올해 출간 26주년을 맞은 <모순>은 최근 교보문고 소설 분야 1위, 종합판매 순위 10위에 올랐다. 지난 5년간 꾸준히 순위가 오르더니 왕좌까지 차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구매자 60% 이상이 2030세대 여성이라는 것.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쌍둥이 엄마와 이모의 상반된 삶을 바라보며,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25세 여성 안진진에게서 지금 독자들은 자신의 지난 과거이자 현재를 본다. 작가는 2000년 에세이 <부엌신>, 동화 <누리야 누리야> 이외에 소설은 공개하지 않고 매체 인터뷰도 응하지 않고 있다. 작가를 대신해 2013년 개정판부터 <모순>을 100쇄 이상 펴낸 출판사 ‘쓰다’ 심은우 대표에게 <모순>이 조명받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책이 다시 읽히는 이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난감한 채 이 현상을 목격 중이라고 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연애나 결혼 같은 관계, 삶을 냉정하게 해석하려는 씩씩한 태도가 현재의 독자들에게 인상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평범한 주인공이 본인과 주변을 관찰하고 깨닫고 성장하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술술 잘 읽히는 세련된 문체로 쓰인 것이 <모순>의 매력입니다. 문장을 필사하며 오래도록 기억하려 하는 독자들도 많고, 여러 후기를 접해왔어요. 20대, 30대, 40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같은 책의 행간에서 더 많은 의미를 깨친다는 반응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양귀자 작가에게 책의 나이보다 어린 독자들이 <모순>을 열렬히 읽고 있다는 반응을 전하자 놀라며 기뻐했다고. 가까이에서 소설을 읽어온 편집자에게도 이 책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제가 처음 <모순>을 읽었을 때는 10대였습니다. 아직은 매사를 좋고 싫음,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눌 수 있던 어린아이였죠. 그 때는 주인공의 선택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주인공 안진진이 사촌 주리에게 한 말을 어렸던 저에게 해줄 수 있겠네요.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모순>은 페미니즘 소설일까?
모 일간지 남자 기자는 최근 술자리에서 업계 동료 여성에게 <모순>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그들은 젠더 이슈가 떠오를 때마다 꾸준히 대화를 나눠왔다. 예능 프로그램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에서 만든 테스트 결과(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등 항목으로 나뉜다)를 공유할 만큼, 서로의 가치관과 성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이다. 그 여성은 왜 <모순>을 건넨 걸까?
일각에서는 <모순>이 주목받는 이유를 2016년 <82년생 김지영> 출간 이후 서점가에 여성의 생애를 다루는 소설이 인기를 끈 데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모순>은 페미니즘 소설일까? 북튜버들의 후기 영상에는 자기 고백이 숱하다. 김장우와 나영규, 두 남자 사이에서의 고민이 커리어와 출산, 육아로 바뀌었을 뿐이다. 반대로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한 친구는 “결혼이 여자의 팔자를 꼰다는 구시대적 이야기 자체가 싫다”며,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 대해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태도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성 차별, 가부장제 같은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이야기가 페미니즘 소설 범주에 속한다면, <모순>을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1992년 출간된 작가의 두 번째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읽은 이들이라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강민주와 안진진은 꽤나 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은 모두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가졌지만, 살아가는 길은 정반대다. 강민주는 여성문제상담소에서 일하며 법을 어기고서라도 불평등에 저항한다. 그의 시각에서 안진진은 성 차별적인 현실을 직시조차 못하는 여성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모순>의 결말에서 안진진의 선택은, 경제적 자립을 남편에게 의탁해 주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모와 엇비슷한 선택을 한다는 시각에서 수동적인 결정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문장에서 안진진의 삶은 분명 이모의 삶과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이 문장을 삶에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의 문장으로 읽지 않을 방도가 있을까? <모순>을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한 견해차가 다양하듯이, 꼭 그만큼 다양한 문제일지 모르겠다. 다만 한 인물의 삶을 적극적으로 해독해 우리 삶으로 끌어들여 무언가를 남기는 게 소설이 주는 효능이라면, <모순> 신드롬은 앞으로도 유효하다. 자기 삶에 이로운 선택지를 찾기 위해, 때론 실수를 인정하면서 내밀한 고민을 지속하는 안진진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으므로.
Credit
- 사진/ 김래영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Celeb's BIG News
#스트레이 키즈, #BTS, #엔믹스, #블랙핑크, #에스파, #세븐틴, #올데이 프로젝트, #지 프룩 파닛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하퍼스 바자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