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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목소리를 듣기, 제주 4.3 사건을 기리며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려는 다섯 편의 이야기. 어두운 기억을 붙드는 봄, 이 작품들을 통해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프로필 by 최강선우 2025.04.01

“폭싹 속았수다.” 제주의 사람들은 이 말을 웃을 때도 울음을 삼킬 때도 쓴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뜨거운 인기를 얻자 다시금 떠오르는 말이 되었다. 말 그대로는 ‘고생 많았다’, 혹은 ‘힘들게 당했다’는 뜻이지만, 그 안에는 견디는 삶과 말 못 할 시대의 이중성이 겹쳐 있다. 드라마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러나 4·3 사건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19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탓도 있겠으나 현존하던 국가 폭력은 배경의 안개처럼만 흐를 뿐이다. 비판도 있었지만, 작품이 드러낸 결락은 오히려 4·3이라는 사건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뤄져왔는지를 정확히 되비추는 장치가 아닐까.

1947~48년 무렵, 제주도에선 4·3 사건이라 불리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념 투쟁이라는 명목 하에 수만명의 무고한 제주 도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이다. 유례없는 국가 폭력 사태였으나 여전히 ‘사건’으로 치부된 채 진상들은 섬 곳곳에 숨겨져 있다.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았고, 말하더라도 ‘부적절한 감정’이나 ‘이념적 오염’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60년이 넘은 지금도 4·3 사건은 ‘겪지 않았지만 알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겪었지만 말할 수 없던 이야기로 남아 있다. 발견되어지고 발화되기를 기다리면서.

오랜 기다림에 응답한 작품들이 있다. 때로는 시끄럽게 소리치고, 보여주면서, 혹은 때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4·3의 존재를 상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들 덕분에 우리는 4.3사건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들에게 되물을 수 있게 된다. “침묵은 왜 반복되었는가?” 그리고 “지금, 여기서 듣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 감독 지혜원, 2023

사진/ 스토리온 제공 사진/ 스토리온 제공

그동안 4.3 사건에서 여성들의 피해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폭력 후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들은 풍문으로만 떠돌 뿐이었다. 생존자들은 입을 굳게 닫을 뿐이었다. ‘목소리들’(감독 지혜원, 프로듀서 김옥영)은 제주 표선면 토산리 달빛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은순 할머니의 침묵을 추적하면서 국가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처절함과 그날의 진실을 맞닥뜨린다. 한 여성 연구자를 따라 대규모 강간 살해 피해가 발생했던 두 사건을 조명하면서 피해자 할머니 네 명의 목소리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비극적 사건이 남긴 깊은 상흔을 기록해 나간다. 후반부에서는 이름 대신에 누구누구의 처, 딸로 기록된 4.3 희생자 위령비를 비춘다. 공식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모두 사라진다는 말과 함께.

사진/ 네이버 영화

사진/ 네이버 영화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TV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지혜원 감독과 방송작가이자 43년째 현역 다큐멘터리스트로 활동하는 김옥영 작가가 손을 잡았다. 제 25회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을 수상했다. 4월 2일 제주 7곳 포함 전국 52곳의 영화관에서 개봉 예정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돌들이 말할 때까지’, 감독 김경만, 2024

사진/ DMZ 영화제 사진/ DMZ 영화제 사진/ DMZ 영화제 사진/ DMZ 영화제 사진/ DMZ 영화제

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겪었던 4.3의 이야기를 듣는 일로 문을 연다. 그 중 네 사람은 재판도 없이 전주형무소로 보내져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다. 카메라는 4.3이 일어난 지 7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주4.3도민연대에서 준비한 재심 재판으로 무죄가 인정될 때까지의 긴 여정을 담담히 따라간다. 이들이 겪은 고초에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시선을 포개고 마구 교차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해저 동굴, 하얀 설원, 푸르른 녹음, 눈물 나게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 여럿 렌즈에 담긴다. 그런데 세심히 들여다 보면 모두 일제의 탄압으로 만들어진 인공 동굴이고 피해자들이 숨어 버틴 피난처임을 서서히 알게 되며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김경만 감독의 풍자와 독창적인 유머는 배제한 채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절제미가 느껴진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강력하게 말할 수 있다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문학동네, 2021

사진/ 문학동네 제공

사진/ 문학동네 제공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실은 더없이 무거운 눈을 맞으며 시작한다. 소설 속 주인공 경하는 한강 작가처럼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쓴 작가다. 경하는 반복해서 같은 꿈을 꾼다. 눈 내리는 벌판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마치 묘비처럼 심겨 있는 꿈. 그는 학살에 대한 꿈임을 직감한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갑자기 친구 인선에게 다쳤다는 전화가 온다. 연락 한 통에 그가 머무는 제주도로 향하게 된 주인공은 눈보라를 헤치며 겨우 인선이 사는 마을인 세천리에 도달하게 된다. 경하는 우연히 칠십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인선의 가족사를 마주한다. 뼈아픈 기억을 발견하고, 기록하며 또 고통스럽게 자문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23p)


시집 『해녀들』, 허영선, 문학동네, 2017

사진/ 문학동네 제공

사진/ 문학동네 제공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껏 한 곳을 지켜온 허영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4·3평화재단 이사로 활동하며 4·3에 대한 기록을 꾸준히 남겨온 인물이기도 하다. 해녀들의 목소리가 언어의 바다처럼 울려 퍼진다. 참혹한 고통 속에서 부모, 형제, 자매를 잃고도 바당(바다) 물질로 생계를 이어온 해녀들의 삶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시인은 4·3항쟁의 아픈 희생을 입밖으로조차 표현하지 못한 제주토박이들의 한을 해녀의 숨비소리로 형상화한다해저 깊이 납덩어리를 차고 잠영해 태왁을 안고 풍덩 거꾸로 잠수하는 해녀들.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제주방언, 제주의 소리, 제주의 토박이 언어가 춤을 춘다. 그들이 채취해온 ‘ㅁ·ㅁ(몸)’은 ‘모자반’인지, 해녀 그들의 신체를 가리키는 몸인지 헷갈릴 지경에 다다른다.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 임철우, 현대문학, 2019

사진/ 현대문학 제공

사진/ 현대문학 제공

2018년 9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소설. 역사의 기록자로서가 아닌 희생된 넋을 위로하고 기리는 임철우 작가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제주 설화와 어우러진 비극적 환상 동화 같다. 소설의 주인공 한은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경험하고 평생 연좌제 속에 고통 받으며 삶을 살아간다. 퇴직 후 제주도로 귀향한 한은 어느 새벽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윤씨 할머니의 강아지 망고를 보게 되고 혼자가 아닌 듯한 망고의 모습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이끌리듯 몽이 남매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 한을 기다리는 건 지워진 4.3 사건의 기억들이었다. 한은 그와 같은 한(恨)을 지닌 이들의 아픔을 발견하는 능력을 남몰래 품고 있던 건 아닐까. 죽은 자의 이야기를 기억해내는 치열한 고민이 깃든 문학적 위로는 눈물 짓게 만든다.


긴 침묵과 망각의 시간. 진실을 파헤치고, 보고, 읽는 행위는 곧 적극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기억한다는 건 곧 책임지는 일과 같다. 돌아온 봄, 잊혀지고 지워진 목소리들이 또다시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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