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보의 또 다른 얼굴, 브뤼셀 공방에서 만나다
브리앙이 완성되는 과정부터 하우스의 아카이브, 한스 옵 드 빅의 회색 정원까지. 델보의 본사이자 공방인 아스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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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9년 브뤼셀에서 시작된 델보. 아스날 공방에서 살펴본 브리앙의 정교한 제작 과정.
- 델보 뮤지엄에서 만난 아카이브와 아티스트 협업 작품.
- 회색 정원에서 발견한 한스 옵 드 빅의 초현실적인 예술 세계.
9월 27일 저녁, 파리에서 브뤼셀로 향했다. 파리 패션위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벨기에를 대표하는 럭셔리 레더 하우스 델보(Delvaux)의 본사이자 공방인 아스날(L’Arsenal)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파리로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2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하우스의 작업 공간을 직접 둘러본다는 설렘을 안고 브뤼셀행 기차에 올랐다.
아스날 내부에 자리한 델보 뮤지엄. 대형 브리앙 백 오브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델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브리앙(Brillant)이다. 단정한 실루엣과 시그너처 버클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클래식한 백. 아스날에서는 브리앙의 정교한 제작 과정은 물론, 브랜드의 역사를 담은 아카이브와 예술가들의 손길이 더해진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었다.
64개의 조각으로 완성되는 브리앙
브뤼셀에 자리한 아스날은 과거 벨기에 군수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공간이다. 델보는 1994년 이곳으로 본사와 공방을 옮겼다. 붉은 벽돌 외관과 철제 구조물이 남아 있는 건물 안에는 가방을 제작하는 공방과 디자인 스튜디오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에 자리한 델보의 본사이자 공방, 아스날(L’Arsenal).
옛 군수공장의 흔적을 간직한 아스날의 붉은 벽돌 외관과 석조 장식.
가장 궁금했던 곳은 역시 공방이었다. 가죽을 고르고 재단하는 작업부터 봉제와 조립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방이 완성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작업대 앞에 앉은 장인들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가죽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필요한 형태를 정확하게 재단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가죽 조각들은 여러 공정을 거쳐 하나의 가방으로 완성된다.
아스날의 작업 공간.
델보의 대표 백 브리앙에는 무려 64개의 가죽 조각과 메탈 부자재가 사용된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과 달리 그 제작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물론 쉽게 보이지 않는 안쪽의 마감까지 세심한 손길이 이어졌다. 매장에서 완성된 가방을 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디테일이었다.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델보의 역사
1829년 브뤼셀에서 탄생한 델보의 역사는 아스날의 뮤지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1883년 벨기에 왕실 공식 공급업체로 선정된 기록부터 1908년 프린세스(Princesse) 핸드백의 특허 자료까지. 그중 눈길을 끈 것은 '황금의 책'이라는 뜻의 리브르 도르(Livre d’Or)였다.
1933년부터 이어져 온 이 아카이브에는 델보가 선보인 가방의 스케치와 디자인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할 때마다 그 기록도 더해진다. 1958년 브뤼셀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탄생한 브리앙 역시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디자인이 지금도 소재와 컬러, 크기를 달리하며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뮤지엄에서는 시대별 아카이브 제품은 물론,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한 컬래버레이션 작품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달라진 소재와 컬러, 실루엣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익숙한 가방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부터 동시대 아티스트와의 협업까지, 클래식한 델보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스 옵 드 빅이 만든 회색 정원
공방과 아카이브를 둘러보기 위해 아스날에 들어설 때부터, 일정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시선을 붙잡은 풍경이 있었다. 바로 벨기에 현대미술가 한스 옵 드 빅(Hans Op de Beeck)이 조성한 회색 정원이다. 높은 유리 천장 아래 검은 연못이 길게 이어지고, 그 주변으로 수련과 대나무, 인물 조각과 체스터필드 소파가 자리했다. 온통 회색빛으로 물든 풍경은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델보는 벨기에 예술가들의 작업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스 옵 드 빅과의 협업 역시 델보가 예술과 맺어온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품이 자리한 장소였다. 일반적인 매장이나 전시장이 아닌, 실제 가방을 제작하는 아스날 내부에 회색 정원을 조성한 것. 정원 바로 옆에서는 장인들이 가죽을 재단하고 봉제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상의 작업 공간과 초현실적인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수정 구슬을 바라보는 소년 조각.
마법 지팡이를 든 소녀 조각.
멀리서 보면 실제 정원 같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정교하게 제작된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못 양 끝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수정 구슬을 품에 안고 눈을 감은 소년이, 반대편에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마법 지팡이를 든 소녀가 자리했다. 중앙에서는 천체 모형이 천천히 회전했다. 가죽 소파처럼 보이는 체스터필드 역시 실제로는 조각으로 제작된 작품이었다. 색채를 덜어낸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풍경.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 특유의 감각이 곳곳에 녹아 있었다.
단색의 풍경과 대비되는 델보 백의 컬러가 돋보인다.
그 가운데 놓인 델보의 가방은 유난히 선명했다. 회색빛 정원과 대비되는 가방의 컬러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손잡이의 곡선과 몸체의 비율에도 시선이 머물렀다. 익숙한 디자인이지만 매장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두 마리의 새가 앉은 브리앙 백.
그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브리앙 위에 나란히 앉은 두 마리의 작은 새. 서로 몸을 기댄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위트 있었다. 한스 옵 드 빅은 브리앙의 클래식한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2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델보가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 지켜온 디자인에 새로운 시선을 더하는 것. 브뤼셀 아스날에서 만난 델보는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고 유쾌했다.
Credit
- 사진/ Delv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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