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관람객의 눈에 담긴 DMZ, 그 이면의 모습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곳, DMZ를 주제로 작업한 예술가들이 보내온 비하인드 신.

프로필 by 고영진 2025.08.29

Behind The DMZ


DMZ는 죽음과 생명의 소리가 공존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딘가다.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 어느 예술가들의 기록.


통일촌에서 남한 대성동에 꽂힌 태극기와 북한 기정동의 인공기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스폿. 철조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방공호와 긴급 상황 시 몸을 숨길 수 있는 대피소가 있다.

통일촌에서 남한 대성동에 꽂힌 태극기와 북한 기정동의 인공기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스폿. 철조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방공호와 긴급 상황 시 몸을 숨길 수 있는 대피소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DMZ 내부 민간인 통제 구역 안에 위치한 통일촌은 제대 군인과 실향 원주민을 포함한 약 120여 가구가 모인 작은 마을이다. 주소는 있지만 어떤 지도 앱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나는 임진강 너머 초평도를 바라보고 섰을 때에야 비로소 이곳이 군사분계선과 불과 4.5km 떨어진 곳임을 실감했다. 대부분 논이었던 초평도는 전쟁 후 민간인 통제 구역에 포함되면서 멸종위기종과 습지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 망원경을 통하지 않아도 초록빛 습지가 눈에 선하다. 느닷없는 총성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뒷산에서 훈련 중인 군부대에서 나는 소리다. 눈에 보이는 곳과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이렇게도 다르다.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km 거리에 위치한 캠프그리브스의 풍경. 숙소와 생활관, 체육관 등 과거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사용했던 군 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km 거리에 위치한 캠프그리브스의 풍경. 숙소와 생활관, 체육관 등 과거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사용했던 군 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난생 처음 DMZ에서 소리와 풍경의 부조화를 경험한 후, 기어코 DMZ를 자신의 작업 앞으로 끌고 온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인간이 만든 이토록 비현실적인 경계에서 당신은 어떤 풍경을 목도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당신이 작업이 되었는지. 당신의 상상에 머무르던 DMZ는 작업 후 어떤 곳으로 다시 새겨졌는지. 다섯 명의 작가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며 십수 년 전의 전시부터 최근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진과 영상, 작업 노트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어떤 장면들과 함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짧은 단상을 보내왔다.



김준

강원도 철원 ‘금강산철교’ 인근의 풍경. 1931년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개통한 금강산선이 지났던 곳이다.

강원도 철원 ‘금강산철교’ 인근의 풍경. 1931년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개통한 금강산선이 지났던 곳이다.

지질학·통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관찰한다. 11월 5일까지 파주 통일촌 일대와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개최되는 «언두 디엠지(UNDO DMZ)»전에서 DMZ 인근 민간인 출입 통제 지역의 소리를 담은 사운드스케이프 작업 <혼재된 신호들>을 선보인다. 임시 감시초소(GP)에서 무거운 방탄조끼를 착용한 채 지척의 지뢰밭을 지나며 채집한 소리는 고요한 전시장에 묘한 긴장을 부여한다.

“DMZ 지역 민통선 내부. 풀벌레의 울음과 세차게 흐르는 한탄강 물줄기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따금 포성이 오갈 때마다 일상을 벗어났다고 느꼈습니다. 조금 더 올라 GP(Guard Post). 실질적인 군사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최전방 감시 초소, 그야말로 경계의 한가운데입니다. 이곳에서는 좌우 고갯짓만으로 남한과 북한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군사 송수신 사운드와 포성, 남한과 북한의 마을회관에서 송출되는 안내 방송이 선명하게 들립니다. 완벽한 비일상입니다. 나에겐 일상의 물건인 녹음 전문 장비들은 이곳에서 매서운 눈초리의 대상이 됩니다. 서로 다른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된 곳에서 소리는 유유히 흐릅니다.”



요네다 도모코

<Mine-DMZ IV>, 2015/2013. 촬영 중에는 무장한 군인들의 제지로 작업 외의 기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작가는 전시에서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공개 컷을 보내왔다. 꽃과 풀은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와 무관히 씩씩하게도 자란다.

<Mine-DMZ IV>, 2015/2013. 촬영 중에는 무장한 군인들의 제지로 작업 외의 기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작가는 전시에서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공개 컷을 보내왔다. 꽃과 풀은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와 무관히 씩씩하게도 자란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일본 태생 사진가 요네다 도모코(Yoneda Tomoko)는 일상적 공간이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작가는 전쟁의 함의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어린이였다. 성인이 되어 런던으로 이주한 후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 해체, 동구권 국가들의 독립을 목격하며 마침내 냉전이 끝났다는 벅찬 환희를 느꼈다. 동시에, 전쟁에서 비롯된 상처는 지금도 어딘가에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DMZ를 방문할 때마다 검문소에다 여권을 맡기고, 촬영 내내 무장한 군인들과 함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광활한 자연 앞에서는 언제나 넋을 놓고 맙니다. 이 지역의 꽃들은 어쩐지 더 여리고 소중해 보여요. 이내 철조망과 지뢰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둘은 팽팽히 대립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자연이 이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DMZ에서 꽃과 식물, 나무는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와 무관하게 뿌리를 내리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때로는 경계 너머로 자신을 내던지기도 하니까요.”



문경원&전준호

2021년, 2채널 영상 설치 작업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 촬영 현장.

2021년, 2채널 영상 설치 작업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 촬영 현장.

2009년부터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묻는 작업을 이어온 문경원과 전준호는 2021년 전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문경원&전준호 -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에서 남측 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자유의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상, 회화 작업을 선보였다. 두 사람에게 이색적인 풍경을 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계에 놓인 마을의 역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짜 삶이다.

“한때는 대성동이라 불렸던 자유의 마을은 지리적으로는 남측에 속하지만, 많은 규제와 감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비상 상황’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마을회관에서 감시 카메라로 지켜볼 수 있는 북한 땅, 군인들과의 접촉이 일상이 된 삶이었어요. 경계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을 지속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공간이 단순히 정치적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곳에도 일상의 무게는 똑같이 매겨집니다. 일상과 제도, 개인과 국가, 현실과 허구가 뒤섞이는 장소에서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질문을 유예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그리하여 DMZ는 우리에게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스테판 크라스닌스키

2025년 4월 피크닉 전시 당시, 작가는 DMZ 인근에서 직접 채집해 온 멸종위기종들을 전시장 옥상 화단에 심어두었다. 작은 팻말에는 식물의 학명과 이를 처음 명명한 학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사진 피크닉 제공

2025년 4월 피크닉 전시 당시, 작가는 DMZ 인근에서 직접 채집해 온 멸종위기종들을 전시장 옥상 화단에 심어두었다. 작은 팻말에는 식물의 학명과 이를 처음 명명한 학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사진 피크닉 제공

전자음악, 필드 레코딩 등을 결합해 독창적인 소리를 만드는 음향예술가 스테판 크라스닌스키(Stephan Crasneanscki)는 지난 4월 서울 피크닉에서 패티 스미스와 함께 소리와 시로 나눈 대화를 엮어 전시를 선보였다. 전시 오프닝 5일 전 한국에 도착한 스테판은 가장 먼저 DMZ로 향했다.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소리가 겹쳐 들릴 때, 숲속을 걷다가 죽은 나무 위에 거대한 버섯 군락이 자리 잡고 있는 광경을 목도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연의 회복력에 대한 경의가 물밀듯 일었다.

“DMZ에서 자연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종들을 여럿 발견할 정도였죠. 놀라웠던 것은 이따금 총성을 비롯한 군사 훈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DMZ에 서식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은 총성과 무전기의 신호음 같은 인공적인 소음에 어떻게 적응했을까요? 저는 지금도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와, 파괴를 상징하는 전쟁 기계의 거칠고 잔혹한 소리가 동시에 들려올 때의 강렬한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연은 인간의 광기를 말없이 지켜보는 증인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연에게 무한히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일 테고요.”



최재은

황량한 땅 위 콘크리트 구조물과 앙상하게 죽어 있는 나무가 혼재한 풍경. 작가는 이 사진에 ‘파편화된 DMZ’라는 설명을 붙였다. 사진 박종우

황량한 땅 위 콘크리트 구조물과 앙상하게 죽어 있는 나무가 혼재한 풍경. 작가는 이 사진에 ‘파편화된 DMZ’라는 설명을 붙였다. 사진 박종우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현대미술가 최재은은 자연계의 ‘열린 경계’와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닫힌 경계’의 대립을 보여주는 영상 <On the Way>로 판문점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았다. 이후 2015년 시작한 프로젝트 <대지의 꿈>으로 남북을 잇는 공중정원과 제2 터널을 이용한 종자은행, 지식 저장소 등을 기획했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자연 국가> 프로젝트의 ‘종자 볼’ 기부를 통해 DMZ의 생태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전쟁의 상처가 잔존해 있는 이 땅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자연 국가> 프로젝트에 무한한 희망을 건다.

작가에게 DMZ는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선명한 곳이다. 안개가 자욱한 날, 지뢰 표지판과 철조망, 그 너머로 걸어 오는 군인들은 이를 상징한다. 사진 박종우

작가에게 DMZ는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선명한 곳이다. 안개가 자욱한 날, 지뢰 표지판과 철조망, 그 너머로 걸어 오는 군인들은 이를 상징한다. 사진 박종우

“70여 년의 휴전 기간 동안 DMZ에서는 크고 작은 교전과 도발, 병력 진입, 경계선 변경, 방화 같은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매설되어 있는 약 150~200만 개의 지뢰는 DMZ를 터전 삼는 동식물의 생명을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생명체들이 DMZ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건, 이 우주의 본성이 생명과 미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기대합니다. <자연 국가> 프로젝트로 많은 이들이 DMZ를 살리는 데 동참해 진정한 자연 국가를 만들 미래를 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닫힌 경계’는 무한으로 ‘열린 경계’인 자연에 의해 그 존재를 상실할 것을 믿습니다.”


Credit

  • 사진/ 김연제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