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LEE BUL)의 작품이 한 자리에 모였다
9월 4일부터 공개되는 화제의 리움 전시 <바자 아트>가 최초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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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Twilight
이불(Lee Bul)의 세계를 제대로 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직시하지 않을 것. 끝없이 곁눈질할 것.

리움미술관 블랙박스에 설치된 <Civitas Solis II>. 왜곡된 거울에 모든 작품이 뒤섞인 풍경이 반사되어 하나의 산수 풍경이 되었다.
1989년 20대 여성 작가 이불은 관객에게 막대사탕을 나눠주고 등산용 밧줄에 몸을 고정해 거꾸로 매달린 채 최승자의 시를 읊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에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졌고 관객들이 놀라 달려들어 작가를 끌어내렸다. 이불의 퍼포먼스 <Abortion>이다. 다음 해, 작가는 촉수가 덜렁거리는 괴물 형상 조각을 입고 일본 도쿄 거리를 누볐다. 행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경찰의 의심을 샀다. <Sorry for suffering – You think I’m a puppy on a picnic?>이 작가의 의도대로 작동한 것이다. 7년 뒤 엄숙한 모더니즘의 상징 같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죽은 생선에 스팽글, 비즈 등 키치한 장식물을 부착해 플라스틱 백 안에 담은 <Majestic Splendor>를 설치했다가 생선의 악취로 인해 작품이 철거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1997년까지의 이불이다.
1998년 한국 사회는 세기말적 두려움과 세기말적 희망이 교차하던 변곡점이었다. 몸에 대해 이야기하던 작가는 사회로 눈을 돌려 문명과 유토피아의 불완전함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허구의 풍경을 재현한 작가의 디스토피아적 풍경에는 완벽을 향해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근현대 사회의 실패가 담겨 있다. 한쪽 팔과 다리가 잘려 있는 ‘Cyborg’가 이상과 결손을 드러낸다면 대척점에 있는 ‘Anagram’은 말 그대로 문자열을 재배치하듯 생물학적 혼종을 만들어 이상과 변이를 보여준다. 2000년대부터 전개된 건축적 조각설치 연작 <Mon grand récit>는 거울-반영의 이미지를 시각 언어로 적극 불러들인 2010년대 <Civitas Solis II>까지 확장됐다. 진화와 변주가 계속되고 있다. 이제 1998년 이후의 이불을 만날 차례다.

<Cyborg W6>, 2001, Hand-cut EVA panels on FRP, polyurethane coating, 232x67x67cm. © Lee Bul. Photo: Jeon Byung-cheol. Courtesy of Leeum Museum of Art.
«이불: 1998년 이후»는 이불의 작업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흐름을 조망하는 서베이 전시예요.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이불-시작»이 초창기 10년간의 퍼포먼스와 소프트 조각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그 이후의 작업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비됩니다.
회고전은 더 큰 공간과 더 긴 시간이 필요하죠. 주제에 집중하기도 어렵고요. 전체를 다루면서 이를 관통하는 시선을 만들려다 보니까 특정한 시점에 중요했던 것이나 작은 요소를 간과하고 지나칠 위험성이 생기기도 해요. 이 전시가 그렇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장시간 동안 천착한 주제가 있다면 그쪽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봤죠. 그게 초반 10년 그리고 지금까지의 27년으로 구분 지어져요. 게다가 내 나이도 얼마 안 되는데 회고전을 하기엔.(웃음) 나는 앞으로 20년은 더 작업할 거예요.
오늘 인터뷰를 위해 작품 설치에 한창인 전시 공간을 특별히 열어주셨어요. 설치가 완성되면 왜곡된 거울이 벽면 전체에 둘러지고, 모든 작품이 뒤섞인 채 하나의 산수 풍경이 펼쳐질 거라 기대합니다. 먼저 풍경에 대해 묻겠습니다.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따르는 전시가 아니라면, 이 작업들은 어떻게 뒤섞여 하나의 풍경이 되나요?
이 작품들은 풍경의 일부입니다. 각각의 작품은 공간 안에 겹쳐서 보이고 절대로 분리시킬 수 없죠. 실제로 우리는 사물을 결코 독립적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귀는 귀, 눈은 눈 따로 잘라서 얼굴을 보지 않잖아요? 지금 이곳의 의자, 물컵, 테이블… 언제나 상황 안에 놓여 있어요. 이 방식을 의도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을 뒤섞는 방식을 좋아해요. 인간에겐 전혀 연관이 없는 두 가지일지라도 그 둘을 어떻게든 연결하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있고,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죠. 방금 말한 지점들을 통해 이번 전시에서 작품을 섞기로 결정했어요. 그렇기에 과거에 제 작품을 봤어도 이번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Civitas Solis II>처럼 애초에 거울을 소재로 한 작품은 물론이고, 노래방 캡슐이나 <Cyborg> 연작도 벽면에 반사되어 새로운 이면을 드러낸다는 점이 신선합니다.
제 작업에서 리플렉션은 여러 가지 메타포를 담고 있죠. 어쩌면 리플렉션을 통해 공간 확장 같은 부수적 효과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오직 리플렉션을 통해서만 작품이 구현되도록 만듭니다. 리플렉션이 없으면 그 작품은 일부밖에 볼 수 없는 거예요. 게다가 심하게 왜곡을 가합니다. 단단하고 평평한 거울은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겠지만, 일부러 거울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모습을 비틉니다. 거기서 질문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보는 물체의 본 모습과 투영된 모습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흔히 1998년 이후 당신의 작업이 소프트 조각에서 딱딱한 조각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서 실수가 시작됩니다. 지금도 하염없이 연약한 재료와 엄청나게 강인한 재료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고, 그건 처음에도 그랬어요.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뿐이에요. 물론 재료가 확장된 건 사실이죠. 그 당시에 없었던 재료도 있을 것이고, 원래 실험을 자주 하는 편이라서 말도 안 되는 신소재를 가져올 때도 있거든요. 그냥 작업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게 어떤 재료이든 개의치 않고 시도한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거예요.
1990년대 후반부터 <Cyborg>, <Anagram> 연작을 작업하셨죠. 전시 공간에 들어서니 확실히 벽에 매달린 <Cyborg W6>가 눈에 띄더라고요.
아직 설치가 덜 돼서 그렇긴 한데.(웃음) 우리는 오랜 습관 때문에 인간이 아닌 사물에서도 자꾸 인간을 읽으려고 하거든요. 하물며 걔는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갖고 있으니까 주목이 되는 건 사실이죠.
초창기 색색의 구슬과 반짝이는 스팽글 같은 키치한 재료를 사용한 것이 어린 시절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혹시 공중에 매달기, 즉 행잉에 관한 최초의 시각적 경험도 있는지요?
그렇지는 않아요. 행잉 작업은 확실한 의도에서 시작한 거예요. <Cyborg>나 <Anagram> 연작이 대표적이죠. 신상이나 고전 조각이 높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잖아요. 거기서 좌대나 기념비적 조형물의 요소를 빼고 시선만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어요. 말하자면, 반드시 매달려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매달리는 겁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면 외벽에 설치된 네 점의 조각 <Long Tail Halo>의 경우 대칭성이 인상 깊었습니다. 장소적 특성 때문이었을까요? 이번 전시에도 한 점이 설치된다죠.
대칭성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건축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예요. 그 건축 언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했어요. 네오 클래시즘 양식을 가져온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원래부터 그 장소에 존재했던 것처럼요. 뜬금없이 이게 왜 여기 있지 하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전략이었어요. 만약 한 작품씩 분리해서 전시하면 다르겠죠. 네오 클래시즘의 언어는 맞지만 대칭적 요소가 없으니까요. 이번 전시에도 한 점이 선보일 텐데 전혀 다른 느낌일 거예요.
작업하는 동안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신병을 앓는 것 같았다”고 말한 걸 보고 그 실체적인 고통이 아주 조금은 상상이 가더라고요. 이불의 작업에는 워낙 노동집약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사실 그 말은 몰입해서 작업하는 일이 즐겁다는 의미였어요. 힘들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담겨 있겠지만,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뜻이겠죠. 에너지가 들면 잘 먹고 정신무장을 한 다음에 다시 하면 돼요.(웃음) 힘들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니까요. 저는 힘든 걸 좋아합니다. 내 한계치까지 근육을 쓰는 걸 좋아해요. 정신도 한계치까지 끌고 가는 게 좋고요. 나가떨어져서 기절하듯 잠들고 다음 날 아침에 회복돼서 와락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걸 좋아해요. 매일 그렇게 살 수만 있으면 바랄 게 없겠어요.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듯한 고요한 작업실에서 일주일 내내 작업에 몰두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창작자의 뾰족함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성과 거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정도까지 목적이 확실한 건 아니고요. 그냥… 재미가 없어요, 나머지는. 작업하는 게 제일 재밌어서 그래요. 물론 작업이 안 될 때는 진짜 미칠 것 같기도 하죠.(웃음) 하지만 작업을 붙잡고 늘어지고 싸우고, 이 과정이 여전히 제일 흥미로워요.
그럼 마음에 들지 않는 작업도 있나요?
당연하죠. 드라마틱하게 찢어버리고, 집어 던지고, 밟고 그러진 않고요.(웃음) 제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서 ‘얘를 어떻게 해야 되지?’ 계속해서 생각하죠. 제 성격이 좀 이상한가 봅니다. 몇 년씩 그렇게 둘 때도 있어요. 그러다 몇 년쯤 지난 뒤에 ‘괜찮네’ 하고 사인하기도 해요. 4~5년은 우스워요. 저는 10년도 그렇게 걸어 놓는 사람이에요.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 수도 있겠으나, 내가 실패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면 어떻게 작업을 지속하겠어요? 원래 작업은 모든 실패할 확률을 통과하면서 나아가는 거예요.
지금도 작업실에 일종의 실패작이 걸려 있나요?
아주 떡- 하니 걸려 있어요.(웃음) 우리 팀원들도 보기 괴로워해요. “저거 좀 어디다가 치워버리면 안 돼요?”라고 하는데 아니다, 걸어 놔라, 했죠. 작품 제목도 그래요. 어느 순간 마음에 안 들면 바꿔버려요. 한번 이름 붙였으니까 못 바꿔, 그런 건 없어요. 발표된 작품일지라도요. 이를테면 ‘몬스터’가 ‘Anagram’으로 바뀌었죠. 언어는 오염이 잘 되니까요. 원래 제가 의도했던 뉘앙스가 다 사라지고 너덜너덜해지면 이름도 갈아야죠.

2015년 한 인터뷰에서 “한때 페인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Perdu> 연작을 발표했죠.
조각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저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조각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구상에서 실현까지 물리적으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들이 있거든요. 구조적으로 집 짓는 것과 비슷해서 중력을 계산하면서 진행해야 하고요. 최초의 구상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도록 수정하고 고칠 수 있는 여유나 틈이 많지 않죠. 그러다 보니까 때때로 머릿속을 스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들을 그대로 놓치는데 그게 아깝더군요. 그래서 화면이라는 것 외에는 제한이 거의 없는 회화 작업도 같이 하고 있었죠. 조각과 병행해온 지 꽤 되었는데, <Perdu> 연작을 통해 정식으로 드러낸 거죠.
조각과 페인팅의 극명한 차이가 ‘이성’과 ‘감정’이라고 언급한 적 있는데, 같은 맥락인가요?
그런데 감정이다,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워요. <Perdu>는 조각적 프로세스를 갖고 있으니까요. 단, 조각이 ‘구축’이라면 <Perdu>는 ‘발굴’에 가깝죠. 저의 조각 작업이 어떤 구조를 계획한 다음에 점점 형태를 덧붙여나가는 과정이라면, <Perdu>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요. 겹겹이 표면을 갈아내면서 어느 한 순간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화면에는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여러 시점이 동시에 남죠. 울퉁불퉁해서 어느 시점에 칠해졌는지도 모를 자국들요. 색상과 이미지로 모습이 드러나니까 회화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물질성도 강력해서 조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조각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전달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말들이 많죠. 누군가는 <Perdu>가 조각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회화라고 하고…. 그런데 그 구분이 모호해진 지 오래고 저한테는 그게 화두도 아니에요. 뭐라고 부르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Perdu XVII>, 2019, Mother-of-pearl, acrylic paint on wooden base panel, steel frame, 163.4x113.4x6.6cm framed. © Lee Bul. Photo: Jeon Byung-cheol. Courtesy of the artist.
그렇다면 1998년의 이불과 2025년의 이불은 다른가요?
저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요. 기억은 왜곡이에요.(웃음) 사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어요.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한번은 ‘나는 왜 이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을까’ 싶어서 매핑 작업을 시작했을 정도랍니다. 제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제가 천착하는 주제들과 맞닿아 있을 테니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아무튼 제 관심은 제가 아니라 제 앞에 놓여 있는 것들입니다. 제 작업의 주제는 항상 ‘과거에 꿈꿨던 미래의 모습에 대한 현재의 판단’이었어요. 과거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과거’에 관심이 없다는 거죠. 나 자신이 어땠는지 내가 나를 규정해봤자죠. 우리는 사건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몰라요.
말한대로 이불의 작업은 ‘과거에 꿈꿨던 미래의 모습에 대한 현재의 판단’이자 이미 실패한 유토피아에 관한 연구입니다. 요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과거의 유산은 무엇인가요?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근대의 석양이랄까요. 석양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지만, 그때 그 시점에서는 어떻게 보였는지, 이를테면 얼마나 시뻘겠는지, 얼마나 쓸쓸했는지, 얼마나 한가했는지…. 여기에 관해 조사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작업으로 하나씩 풀어가면 구체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미래가 아닌 과거, 일출이 아닌 석양, 성공이 아닌 실패.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당신에게는 왜 중요한가요?
만약 미래가 궁금하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예요. 이를테면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 관한 황당한 상상은 비슷하게 등장해요. 시대를 불문하고 의식을 확장하거나 자유를 찾기 위한 낙관적 시도가 있었죠. 그러나 상상 그 자체가 아니라 상상이 어떻게 시도되었고 왜 실패했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해요. 혹은 왜 어떤 것은 지치지도 않고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작동하는지도요.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는 반복이에요. 과신하거나 좌절하거나.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본다는 건 분석한다는 뜻입니다. 그림자를 본다고 해서 빛을 안 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럴 때 필요한 게 곁눈질이에요.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보면서 빛과 어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곁눈질로 보는 것. 어쩌면 이번 전시에 필요한 감상법인지도 모르겠네요.
상대방의 눈만 쳐다보면 얼굴이 안 보입니다.(웃음)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아무것도 못 보는 것과 같아요.
※ «이불: 1998년 이후»는 9월 4일부터 2026년 1월 4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Credit
- 사진/ 이준경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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