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마크 브래드포드, 오늘날 가장 미국적인 현대미술가

지금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5.09.02

You Never Walk Alone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의 작품 위를 걷는 일. 말하자면, 누군가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떠오르다> 위를 걷거나 뛰고 있는 마크 브래드포드들.

<떠오르다> 위를 걷거나 뛰고 있는 마크 브래드포드들.

전시의 서막을 여는 <떠오르다(Float)>는 관객들이 직접 그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작품입니다. 걷는 행위를 통해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물리적인 감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죠. 전통적으로 미술관 벽면에 걸려 있던 작품을 떼어내 바닥에 깔고 그걸 밟을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온 건가요?

미술사 안에서 생각해보면 캔버스의 틀은 뼈, 캔버스 천은 피부와 같은 거예요. 저는 작품의 지지대를 없앴어요. 이 작품은 회화의 권력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겁니다. 왜 어떤 작품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미술계 안의 위계에 대해 인식합니다. 처음에 회화를 매체로 활용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저의 목표는 ‘회화처럼 보이려고 투쟁하지만 회화가 아닌 것’을 만드는 거였어요. 제가 의식적으로 저급하거나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재료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고요.

<떠오르다(Float)> 역시 로스앤젤레스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노끈 등 ‘도시의 부산물’을 이어 붙여서 제작했고요.

맞아요. 그러면서도 그 작업들이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 혹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같은 작가들의 그림과 대화를 나누게끔 만들고 싶었죠. 저는 스스로를 ‘미술사’와 ‘사회적 기억을 품고 있는 재료’ 사이의 혼종적 존재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이 작품을 보고 마치 리히터의 회화가 바닥에 놓인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미술사적으로 완전히 다른 해석도 가능하죠. 저는 제가 회화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제가 콜라주 작업을 한다고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는 2005년 미국 남부를 덮친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미국 최초의 퀴어 운동가이자 드래그 퀸이었던 윌리엄 도어시 스완의 삶과 병치시킨 연작입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특정한 면을 고려하기보다는 극단적인 고난이나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도 자기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보편적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스완은 그런 역경을 극복하고 퀴어로서 안전하게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볼룸 문화를 만들어낸 인물이죠. 저는 이 작품을 하나의 무도회장으로 구성하고 싶었고,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 전시 공간을 봤을 때 직감했어요. ‘아, 이 공간을 충분히 차지할 수 있겠구나.’


줄곧 당신이 이름 짓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중가요의 노랫말이나 영화 대사, 광고 문구 등에서 가져온 일상적인 문장을 전시나 작품 제목으로 절묘하게 불러들이죠. «Keep Walking»이라는 이번 전시의 다소 정직한 제목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이번 전시 제목은 작품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비롯되었어요. 걷거나(<떠오르다> <나이아가라>), 기차를 타거나(<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핑크 레이디>), 세계를 가로지르거나(<파랑> <믿음의 배신>). 모두 움직임에 관한 이야기들이니까요.

이번 순회전을 주최한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이 원래 기차역이었기 때문에 20세기에 인종 차별을 피해 이주한 600만 명 흑인들의 '대이주'를 재구성한 기차표 연작이 더 입체적이었죠. 사실 이곳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이 위치한 용산도 1900년 대한제국 말기부터 철도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아나요?

정말인가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저는 미술관 근처를 자주 걸어 다녔고 특히 서울역과 용산역 주변의 이동성을 흥미롭게 살펴보긴 했어요. 거기까진 미처 연결시키지 못했네요. 흥미로운 우연이군요.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와 당신의 첫 번째 연작 <파랑(Blue)>을 비교하면 어떤 변화가 감지됩니다. 최근 들어 당신의 작업은 점점 더 거대하게 확장되고 있어요. <파랑(Blue)>에서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일상적으로 접했던 자그마한 파마 용지(엔드 페이퍼)를 나열했다면,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는 전시장 전체를 검은 벽지와 종이 표면을 산화시켜 만들어낸 금빛 무늬로 덮어버렸죠. 단순히 작품이나 재료의 스케일에 대해 말하려는 건 아니고요.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 역시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사실 저는 아주 단순하고 가느다란 작업을 만들고 싶어요. 이상하게도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제가 너무 복잡한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종이를 반죽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물에 적시고 또 적셔야 해요. 안 그러면 금방 굳어버리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 작업이 마치 현대판 프레스코화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사운드 및 영상 설치 작업 <타오르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캐릭터 피노키오의 설정을 뒤집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진실과 개인의 복잡한 정체성을 탐구한다. 검게 칠해진 신문지는 흑인 남성성의 위선과 언론의 은폐를 상징한다.

사운드 및 영상 설치 작업 <타오르는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캐릭터 피노키오의 설정을 뒤집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진실과 개인의 복잡한 정체성을 탐구한다. 검게 칠해진 신문지는 흑인 남성성의 위선과 언론의 은폐를 상징한다.

종이는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죠. 어느 인터뷰에서 “종이는 용서가 없다”고 표현한 것을 기억해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책을 펼쳐볼까요. 앞장이 보이죠. 하지만 동시에 뒷장을 볼 순 없어요. 종이는 적당히 봐주는 게 없어요. 만약 당신이 종이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반드시 찢어내거나 티슈처럼 뽑아내야 하죠. 제가 처음 재료로 썼던 파마 용지는 마치 유화 물감 같았어요. 반투명해서 겹치면 안쪽이 비쳐 보이는 재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일반적인 종이는 그렇지 않죠. 유화 물감도 아니고 티슈 페이퍼도 아니에요. 아주 냉정하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말하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도 종이를 재료로 한 작업이에요. 거리에서 수집한 부동산 광고 전단지, 공연 포스터 등의 인쇄물을 활용했죠.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래의 용도였을 푸 파이터스의 공연 안내 문구도 슬며시 보이고요. 그런데 오늘날의 도시는 디지털 파사드로 뒤덮여가고 있어요. 근래에 저는 서울의 거리에서 종이라는 물성을 마주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로스앤젤레스도 다르지 않을 테죠. 이런 변화가 작업에 영향을 미치나요?

흥미롭군요. 혹시 제 최근작에 쓰인 종이들이 근처 제지소에서 구매한 것이라는 걸 눈치챈 건가요?(웃음) 맞아요. 종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예전에는 그냥 문밖을 나가기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몇 마일이나 떨어진 다른 동네로 종이를 구하러 가야 해요. 이렇게 작업하다 보니 때론 제 스스로가 먹잇감을 찾아서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사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아직까진 괜찮아요. 신문지으로도 충분해요.


작업실 이웃이었던 멜빈이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담은 영상 작업 <나이아가라>. 메릴린 먼로 주연의 동명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업실 이웃이었던 멜빈이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담은 영상 작업 <나이아가라>. 메릴린 먼로 주연의 동명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 형상의 조각 <데스 드롭(Death Drop)>은 당신의 신체 사이즈를 32% 확대해서 구현했어요. 어린 시절 뒤로 넘어졌던 기억에서 영감을 얻은 건데, 이를 다룬 동명의 영상 <데스 드롭(Death Drop)>도 선보이죠. 지금까지 당신이 시도한 적 없는 자전적인 접근인데요.

안전한 공간과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 대해 고민했던 저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몸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주목한 건 1973년작 영상 <데스 드롭>과 2023년작 조각 <데스 드롭>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간, 그 사이의 삶이었어요. 영상을 찍었던 12살 무렵 저는 사춘기였고 바깥 세상은 저에게 점점 위험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단지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신체적 안전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가던 차였죠. 동시에 저의 창의성이 본격적으로 샘솟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고요.

1973년 당신과 2023년 당신 사이엔 어떤 점이 가장 다른가요? <데스 드롭>은 퀴어 파티장의 퍼포먼스 동작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조각은 언뜻 보면 추락사한 시체의 자세 같지만 실은 열정적인 춤 동작을 표현한 것이죠.

저에게 이 작품은 삶에서 가장 취약했던 순간을 상징합니다. 그동안 저는 강인해졌고 스스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혹자는 “잭슨 폴록이 행위를 회화에 끌어들였다면 마크 브래드포드는 사회적 실천을 회화에 끌어들인 선구자”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엄마의 미용실이 있던 건물에 비영리 재단 아트+프랙티스(Art+Practice)를 설립해 현대미술과 위탁가정의 청소년을 연결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예술 교육에 관심이 커지고 있어요. 대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심지어 갓난아이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제가 다니는 학교에선 직업 탐구의 일환으로 의사, 변호사, 정치인인 부모님을 수업에 초청하곤 했어요. 아이들은 ‘이게 내 아빠야’, ‘이게 내 엄마야’ 하고 자랑스러워했죠. 그런데 예술가는 어디에 있죠? 아까 말한 영상 <데스 드롭>의 작은 소년 있죠. 우리는 그 소년을 위해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해요. 창의적인, ‘마이 피플’을 위한 공간 말입니다.


<명백한 운명> 앞에 우뚝 선 마크 브래드포드.

<명백한 운명> 앞에 우뚝 선 마크 브래드포드.

이 또한 예술가의 일인가요?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예술가라는 단어 뒤에 슬래시를 붙이지 않는다. 밀폐된 작업실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지역사회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게 작업”이라고 말한 적 있어요.

저는 제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곧 제가 속한 곳이라고 느낍니다. 제가 사는 사우스 센트럴의 작업실이든 유럽의 어느 패션쇼장이든 이곳 서울의 거리든 마찬가지죠. 변해야 할 건 공간이지 제가 아녜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의 대표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남북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대사에서 제목을 따온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작품을 통해 미국 역사의 실패와 왜곡을 성찰하고 미래를 도모하고자 했죠. 공교롭게도 비엔날레 개막 전에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어 더욱 입체적으로 감상한 기억이 납니다. 각설하고, 지금 현재 ‘미국적’이라는 걸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 가요?

제가 아는 미국인, 그중에서도 이른바 ‘Americanists’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미국적 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원래 그런 법이죠.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의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항상 그런 식의 괴롭힘이 따릅니다. 첫 번째 괴롭힘은 보통 가족 안에서 시작되고 그다음은 커뮤니티나 학교로 확장되죠. 때로는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발생합니다. 중요한 건, 그런 괴롭힘이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걸 상기하는 일이에요.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길을 찾아나가는지가 더 중요해요.

“네가 그 운동장을 어떻게든 건너는 법을 찾아야 하겠지만,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 거야.” 유년 시절 당신의 엄마가 해주었던 말이죠. 이외에도 미국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면서 당신에게 힘이 된 타인의 말이 더 있는지 궁급합니다.

어떤 흑인 여성이 있었어요. 누군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엄마의 미용실에 오는 단골손님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아직도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너를 그저 참아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지 말거라. 너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기뻐해주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렴.” 저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아요. 누군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죠. 결코 사랑해달라고 구걸하지 않아요. 저는 다섯 살때부터 저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직시하고 있어요. 흑인이고, 게이이고, 가난했으니까요. 하지만 과거에도 신경 쓰지 않았고 지금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살겠다는 의미가 아녜요. 저를 참아주는 사람들보다 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기뻐해주는 사람들과 기꺼이 충만한 시간을 보낼 겁니다.


※ «Mark Bradford: Keep Walking»은 2026년 1월 25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다.


Credit

  • 사진/ 곽기곤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